Page 100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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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가 많았던 사실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정조는 남한산성의 보수공사를 마무리한 수어사 서명응, 광주 부윤 이명중, 유영 별장 황인영
을 비롯한 실무자들을 시상하면서 이런 당부를 빠트리지 않았다.
“맹자가 ‘지세(地勢)의 유리함이 인심이 화합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비록 이런 천연적인
해자를 갖춘 성이 있다 해도 진실로 인심이 화합하지 않으면 어떻게 보존하고 지킬 수 있겠는
가.” 9)
서명응을 이어 성곽에 벽돌 사용을 주장한 사람은 대사헌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이다.
홍양호는 최초의 무인들의 전기인 <해동명장전>을 지었을 만큼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
이다. 1783년 사신으로 북경을 방문하여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살펴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홍양
10)
호는 귀국하자마자 ‘국가의 정책에 도움이 되고 민생에 절실한 여섯 가지’를 건의했다. 이 중
에서 가장 앞세운 것이 수레 제도와 벽돌 만드는 법이다. “민생의 기구는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
이 없습니다.”로 시작하는 홍양호의 상소는 부국강병의 열망으로 가득하다. 만리장성을 모두 벽
돌로 쌓은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홍양호는 벽돌 사용이 쉬움은 수레 사용과도 비교가 안 되는
것이라며, 북경에 사람을 보내 벽돌제작법을 배워와 먼저 궁성에서부터 적용해 보고 제작법을
팔도에 반포하자고 건의했다. 이러한 제안에 비변사도 적극 공감하며 군문에서 사람을 선발하
여 북경에 보내 수레 제작과 벽돌 굽는 법을 자세히 탐지해 오도록 지시하라고 요청하자 정조도
이를 수락했다.
4. 벽돌에 대한 정조의 생각
사실 벽돌은 더 일찍부터 성을 쌓을 때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734년에 축성한 강화성이
다.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 논란이 되었다. 벽돌은 유용하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소재였다. 1779년에 남한산성을 쌓으면서 벽돌을 사용하자 또 다시 비용문제가 거론되었다. 그
로부터 10년이 지난 1790년에 수원에 성곽을 건설하자고 상소를 올린 강유는 새로운 방안을 제
시했다.
“논의하는 사람들이 만약 석성을 쌓자면 비용이 많이 든다 하여 어렵게 여긴다면, 토성을 견
9) <일성록> 정조 3년 6월 18일. 《맹자》〈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천시가 이롭다 해도 땅의 형세가 유리한 것보다는 못하고, 지리
상으로 유리한 형세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화합하는 것보다는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하였다.
10) 정조 7년 7월 18일 1783년
98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