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6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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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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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직 강유의 상소를 시작으로 독산성 보수와 화성 건설이 예고되었다. 1793년 1월, 정조
는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하면서 경기 좌방영(左防營)을 남양의 독산성으로 옮겨 설치하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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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 겸하던 토포사도 방어사가 동시에 수행하도록 했다. 군대에서 좌(左)는 선봉을 뜻한다.
독산성은 화성의 선봉이라는 의미이다.
장용영에서 <내영과 외영의 새로 정한 절목>을 정조에게 올렸다. 장용영 내영은 한성을 외
영은 수원 화성과 현륭원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절목 중 독산성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
다.
1. 독성산성은 이미 요새로서의 중요한 지역이자 또 군량을 쌓아둔 곳이니, 방어하는 도리를 소홀
하게 할 수 없다. 전에 총융청의 소관이었던 장초(壯抄) 2초, 아병 1초, 둔(屯)장초 68명, 군수보(保)
125명을, 본성의 소관 아래 모집해 들인 군관 30인, 수첩군관 130인, 아병 2초, 봉족군 400명, 별무
사 1,523명과 합해서 성을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본성에 전속시키고, 그 중 장초 2초, 아병 1초, 둔장
초 68명, 군수보 125명은 본래 쌀을 납부하는 군인들이었으니, 그 납부한 쌀은 외영(수원부 관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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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받아 유치한다.
정조는 강유의 상소를 받아들여 수원 신읍에 성곽을 쌓기로 결정하고 기본 설계를 정약용에
게 맡겼다. 정약용은 전래 조선의 방식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우수한 점을 적극 수용하여 성곽
곳곳에 치성을 배치하고 공심돈까지 설치하여 방어에 유리하도록 설계하였다. 아울러 정조는
신읍 근처에 둔전을 설치하고 성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농사를 시켜 군영의 비용을 마련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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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하였다.
1794년 1월, 정조는 팔달산에 올라 화성 축성을 선포하면서 수원부사 조심태에게 독산성 주
변에 나무를 심고 가꾸도록 하였다. 독산성 중군이 산성에 부속된 마을 사람들 중에서 식목인
33) 정조13년(1789) 10월 7일(기미)
34) <승정원일기> 1787년(정조 11) 8월 28일 (계해)
35) 정조17년(1793 계축) 1월 16일(경술)
36) 정조17년(1793) 1월 25일(기미)
37) <승정원일기> 1792년(정조 16) 6월 30일 (정유)
94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