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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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때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와 박제가, 장용영 초관 백동수를 불러 사도세자가 펴낸 <
               무예신보>의 18가지 무예에 마상기예 6가지를 덧붙여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명을 내

               렸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는 임진왜란 이후 약 100년이 지난 1690년 무렵 군영에서
               익이고 있던 무예들이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 총융청은 100년 이상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무예의 자세와 동작이 군영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

               을 확인한 정조는 합동군사 훈련을 자주 벌이는 한편 무예를 표준화하기 위해 <무예도보통지>
               를 출판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1790년 4월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한중일
               의 우수한 무예 24가지가 실려 있다.



                 1권: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钂鈀), 낭선(狼筅), 기창(騎槍)

                 2권: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3권: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 등패(藤牌)

                 4권: 권법(拳法), 곤봉(棍棒), 편곤(鞭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은 <무예신보>를 펴낸 사도세자의 군사정책을 계승하는 사업이기도
               하다. 이 또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4. 문무겸전의 이상을 실현할 최적의 공간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독산성은 다시 한 번 주목되었다. 팔달산에

               화성을 건설하면서 독산성은 화산 현륭원과 수원 화성, 한성을 호위하는 요새지로 구축되었
               다. 정조는 독산성에 종2품의 중군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독산성의 전략적 역할을 강화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죽음으로 화성과 독산성에 배치한 장용영은 해체되고 말았다. 수원
               화성에 주둔하던 장용영 외영의 병력 5,000명 중에서 겨우 3초(369명)만 남겨두었을 뿐이다.

               독산성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순조시대에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의 국방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왕실을 호위하고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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