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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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독산성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1869년(고종6)에 나타난

               다. 이때 화성 내의 백성 200명과 독산성에서 50명을 뽑아 새로 정군(正軍)을 만들어 중요한
               지대를 호위하도록 결정하였다. 순조 때 3초의 병력을 두었던 것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
               다. 그 많은 병력과 재화는 안동 김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등 몇몇 집안의 사고로 들어가 버

               렸다. 250명의 병력을 관리하는 비용도 흥선대원군이 하사한 돈 4만 냥과 본영(本營: 화성)의
                                                         40)
               외탕고의 돈 12,000냥을 분배하여 쓰도록 하였다.  임란 이후 수원과 독산성을 지키던 5,000
               의 병력은 이제 250명으로 줄어들었다.







               Ⅴ. 독산성과 민족무예





               1. 독산성에서 무예를 시험하다



                 1594년 10월, 독산성에서 무예시험[試才]을 보았다. 선조의 어명을 받은 신하들이 독산성을
                                                                                        41)
               찾아 군사를 위로하고 무예시험을 보아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에게 상을 내렸던 것이다.
                 1593년부터 훈련도감에서 창술과 검법이 중심인 명나라 절강병법을 교육하였다. 서울과 경
               기도는 도체찰사 유성룡이 관할하였고, 평안도는 도순찰사 이원익이 관할하였다. 이와 관련하
               여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평안도내의 조련하는 군졸을 평양에 모두 모아서 대대적으로

               사열하고, 무예를 시험해서 상을 내리고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때 이원익은 평양에 있는 서원
               과 향교를 ‘서검재(書劍齋)’로 이름을 바꾸고 유생들이 학문을 익히는 여가에 무예를 수련하는
               규정을 세웠다. 문약에 빠져 있던 조선을 구원할 길은 문무겸전(文武兼全)을 추구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평안도와 경기 강화도에서 시행된 서검재의 전통은 숙종시대까지 이어졌







               40) 고종6년(1869 기사) 12월 8일(을사)
               41) 선조27년(1594 갑오) 10월 17일(신유)



               96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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