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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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정조, 독산성의 새로운 시대를 열다





               1. 독산성에서 운주당의 의미를 되새기다



                 정조는 1789년 10월,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화산에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1790년 봄, 정조는 화산 현륭원을 참배하는 길에 독산성에서 특별한 행사를 벌였다. 31년

               전,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던 아버지의 건강했던 모습을 백성들의 증언을 통해 밝히는 이벤
               트였다. 정조는 독산성 지휘소인 장대에 올라 아버지 장헌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산을 굽어본
               후 내려왔다. 1760년 온양 온천을 가던 사도세자가 독산성 운주당(運籌堂)을 숙소로 삼고 하

               루를 지냈던 일을 환기했다. 정조는 운주당에 도착하여 국왕 행차를 보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
               들에게 물었다. “경진년(1760)에 어가가 머물렀을 때 구경한 사람이 있는가?”모여 있던 노인
               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성들의 고충을 친히 물어보시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려주셨

               습니다.”노인들은 세자가 진남루(鎭南樓)에 올라 활을 쏘아 과녁에 4발을 명중시켰던 일도 증
               언했다. 사도세자가 독산성에서 백성들에게 인화(人和)의 덕치를 펼쳤던 것을 확인했다. 감격

               한 정조는 노인들 모두에게 품계를 한 자급씩 올려주고, 또한 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집집
               마다 쌀 한 섬씩을 나누어 주었다. 화성 득중정(得中亭)을 찾은 정조는 문무 대신들과 함께 활
               다섯 발을 쏘아 네 발을 맞추었다. 아버지가 진남루에 올라 활을 쏘았을 때처럼 자신도 같은

               개수를 맞추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 날을 기념하여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 1740~1799)에게
                                          30)
               금갑(金甲) 한 벌을 내려주었다.  현륭원 조성과 신읍치를 조성하는 어려운 일을 차질 없이
               처리한 수원유수 조심태의 헌신과 수고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이처럼 정조는 장용영을 창설할 때나 현륭원을 조성하고 신도시를 건설할 때도 인화를 최우

               선하는 정책을 폈다.








               30) 정조14년(1790 경술) 2월 10일(신유)



               92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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