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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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효종의 북벌정책과 독산성-수원을 무향이라 부른다



                 효종시대(재위1649~1659)에 조선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효종은 어영청을 북벌의
               선봉군으로 삼아 이완(李浣, 1602~1674)을 중심으로 화기 개량을 비롯한 신무기 개발과 병

               력 증강에 집중하였다. 1654년 12월에 총융사 김응해를 보내 경기 여러 고을의 군사와 병기
               들을 점검했는데 수원이 도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효종은 수원부사 유혁연(柳赫然,
                                          19)
                                                                  20)
               1616~1680)에게 말을 하사하고  특별히 승지에 제수하였다.  얼마 후 유혁연을 어영대장에
               임명하여 훈련대장 이완과 함께 북벌정책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군사들의 무예 실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효종은 국왕이 친림한 자리에서 군사들의
               무예 실력을 겨루는 관무재(觀武才)를 열어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군사들에게 부상을 내려 사기
               를 높였다. 이때도 수원에 병기와 군장을 갖춘 5,000 정예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효종이 “수원

               군사가 훈련도감 군사보다 더 낫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전력이 충실하였다. 효종은 “임진왜
               란 이후 수원을 무향(武鄕)이라 부른다”며 군사들을 제대로 대우해줄 것을 신하들에게 거듭 당
                       21)
               부하였다.  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임금들은 수원을 무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훈련대장 이완은 서인, 어영대장 유혁연은 남인 출신이다. 하지만 두 장수는 기찰을 풀어 서

               로의 약점을 찾아내던 이전까지의 폐습을 버리고 국방력 강화에 전력을 기울여 국왕의 깊은
               신뢰와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완은 무인 출신으로 정승에 오를 정도로 인품과 무예
               실력을 겸비한 장수였으며,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대장을 지낸 유혁연은 문무겸전의 장

               수로 서예에 뛰어났다. 특히 그는 활쏘기에만 능한 일반 장수들과 달리 검술 실력도 빼어났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군사들의 무예실력이 늘어났던 것이다. 속오군 소속 포수들이 청의 요
               청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나선정벌’에 두 차례 참전하여 사격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
               가를 받았다. 러시아군과의 전투를 통해 조선군의 전력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정책은 안팎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비밀리에 추진된 사업이라 많은 제약





               19) 효종5년(1654 갑오) 12월 5일(신유)
               20) 효종5년(1654 갑오) 12월 19일(을해)
               21) <승정원일기>효종2년(1651) 10월 25일



               88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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