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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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리보다 인화를 우선했어야 할 광해군의 실정
임진왜란 이후 독산성은 경기도의 가장 중요한 성곽으로 주목되었다. 예컨대 1610년 비변사
의 보고에 따르면, 왜적이 물러간 이후 경기도의 산성 17곳 중에서 수원의 독산성만 유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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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재위1608~1623) 역시 독산성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임란 때 한양을 버
리고 평안도로 피난을 떠난 부왕 선조(재위1567~1608)를 대신하여 분조(分朝)를 이끌고 팔도
를 다니며 군사를 지휘했던 경험이 있었다. 광해군은 “제왕들은 성읍을 따로 건설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했다”면서 변란에 대비할 요새를 마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광해군은 강
화도와 마주한 교하(交河, 김포)지역에 “독성산성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 때때로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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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할 계획”이라며 비밀리에 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같은 광해군의 말을 통해 임란 이후
독산성에 행궁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왜적의 재침을 우려한 광해군은 “하삼도(경상·전라·충청)는 우리나라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곳이다. 적의 예봉이 삼도까지 짓밟는다면 방법이 없으니 수원의 독성·공주의 금강 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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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미리 요새를 만들어 굳게 지키어 적의 흉악한 공격을 막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 강
조하였다. 독산성을 요새화하려던 광해군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얼마 후 군사반란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났다. 실리외교에 바탕을 둔 광해군의 군사전략은 명분을 앞세운 친명
파 서인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2. 병자호란과 독산성-훈련도감군보다 낫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집권에 성공한 서인정권은 군사력을 반란 예방에 집중하였다. 그럼에
도 1624년에 내부의 군사반란인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독산성은 인조의 피난처가 되었다.
1624년 2월 11일, 이괄의 반군이 입성하자 인조를 태운 가마가 한양을 빠져나와 찾은 곳이 수
15) 광해2년(1610 경술) 1월 17일(갑오)
16) 광해5년(1613 계축) 1월 3일(신유)
17) 광해14년(1622 임술) 7월 20일(갑인)
86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