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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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지리와 인화의 요새, 독산성





                  오산을 상징하는 독산성은 풍부한 역사문화의 공간이다. 독산성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했던 터전이다.
                  독산(禿山)은 ‘민둥산’이라는 말이다. 민둥산은 봉우리에 나무가 없다는 뜻인데, 숲이 우거진

                현재의 독산성의 풍경을 떠올리면 독산성이란 이름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1789년 가을,
                정조가 독산성 이웃에 자리한 화산에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독산성의 수목은
                특별하게 관리되었다.

                  독산성은 ‘독성(禿城)’혹은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불려졌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
                면 독산성으로는 2회, 독성산성으로는 16회, 독성으로는 무려 86회가 검색된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는 독산성보다 독성, 혹은 독성산성으로 더 많이 불렸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독산성은 비록 높지는 않지만 봉우리 주변이 가파른 비탈로 둘러싸여 있고 정상 부위가 평
                평하여 방어하기에 좋은 천혜의 요새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삼남(三南, 경상 전라 충청)
                과 한양을 잇는 경기도에 있다는 지정학적 위치도 크게 한몫했다. 독산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 제17대 내물왕시대(재위356~402)에 백제의 독산성주(城主)가 300명
                의 주민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자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독산성이 요새가 되기에는 약점이 있다. 산의 규모가 크지 않고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
                다. 이처럼 독산성은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장기간 주둔하기 어렵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독산성은 조선시대, 특히 임진왜란 때부터 근대 이전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관

                리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독산성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새로 인식
                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군사적 측면에서 살펴본 것이
                다. 독산성은 맹자가 승리의 조건으로 제시한 ‘지리(地利)와 인화(人和)’가 조화를 이룬 역사 공

                간이다.












                                                                    독산성에 깃든 인화(人和)의 정신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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