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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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유리한 지형을 찾아내 먼저 점거했기 때문이라
                         2)
                는 것이다.


                  용인전투의 패배로 경기도가 적중에 떨어지면서 왜군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식량과 재물을 빼앗겼다. 승리할 전망이 보이지 않자 동족을 배반하고 왜적을 따라 도성에 들
                어간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때에 호남의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의병부대가 수원

                에 도착하여 독산성에 들어갔다. 김천일은 성내에서 왜적에게 빌붙은 사람을 찾아내 목을 베
                고 의병부대가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주위에 알렸다. 김천일 의병부대가 독산성을
                장악했다는 소문이 나자 경기도의 많은 사대부들이 성으로 찾아왔다.                      3)


                  서울로 진격하던 전라감사 권율(權慄, 1537~1599)도 독산성에 주둔하며 견고한 진지를 구
                축하고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字喜多秀家) 부대의 포위 공격을 유격전과 지구전으로

                물리쳤다. 이 전투로 ‘쌀로 말을 목욕시켰다’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탄생되었다. 임란 3대
                첩의 하나인 권율의 행주대첩은 이처럼 독산성에서 군사력을 보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체찰사로서 전쟁을 총지휘했던 유성룡(柳成龍, 1542~1607)도 독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4)
                강조했다.  임란 당시, 경기남부 지역에서 독산성은 유일하게 방어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이
                무렵 독산성은 남한산성보다 훨씬 중시되었다. 그러나 독산성을 잠시 비워두었을 때 전혀 다
                른 문제가 발생했다.
                  2년이 지난 1594년 가을, 경기도 일부 백성들이 무장하여 관군을 공격하고 고을을 약탈할

                뿐 아니라 장수를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 반란군이 독산성에 웅거하고 있다는
                                                  5)
                소문까지 나돌아 선조가 불안에 떨었다.  제대로 무장을 갖추지 못한 반군이 독산성을 점거해
                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조정에서 서둘러 독산성을 관리하자는 논의
                가 진행되었다.








                2) 선조27년(1594 갑오) 11월 5일(기묘)
                3) 선수25년(1592 임진) 6월 1일(기축)
                4) 선조 26년(1593 계사) 10월 22일(임인)
                5) 선조 27년(1594 갑오) 9월 27일(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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