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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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방에는 속오군(束伍軍)을 창설하였다. 수원에 속오군을 창설했을 때 병사의 수가
3,000명이다. 이들을 지휘한 중군 직속으로 기수·고수·취수가 60여 명이 있었다. 독산성에
는 병자호란 직후인 무인년(1638)·기묘년(1639)에 포(布)를 내는 자가 70호였으며, 20호가
유방[근무]을 서고 있었다.
Ⅲ. 임진왜란 이후-지리(地利)와 인화(人和)
전쟁이 끝났으나 독산성에 대한 조정의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1601년에 체찰사 윤두
수(尹斗壽, 1533~1601)가 독산성을 충실히 관리할 것을 요청하였다. 경기도 수원에 정예병
1,000명이 있고 독산성과 같은 요새지도 있으니 성에 병영을 설치하고 명망 있는 지휘관을 파
견하고 비변사 둔전의 곡식을 제공하여 군사를 양성하면 효과가 좋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13)
비변사는 수원 독산성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처럼 남한산성에서도 산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14)
조련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사관(史官)은 “이전에 백성들이 많은 힘과 돈을 들여 산성과
포루를 축조했으나 정작 왜적이 침입하자 군량과 군기를 모두 버린 채 달아났다. 맹자가 ‘지리
(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인화에는 힘쓰지 않고 산성을 축
조하는 것으로 나라를 보존시키는 계책을 삼고 있다.”며 비변사의 주장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성곽이 아무리 튼튼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관의 주장은 옳다. 하지
만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에도 양반사대부들은 인화에 관심이 없었다. 위기가 지나가자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싸운 노비들을 해방하고 상인들의 신분을 높여주겠다던 약속도 저버렸다. 국
방과 세금은 여전히 일반 백성들의 몫이었다.
13) 선조34년(1601 신축) 3월 17일(을묘)
14) 선조36년(1603 계묘) 2월 18일(을사)
독산성에 깃든 인화(人和)의 정신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