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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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충청도에서 진군하는 반란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원 독산성

               이 맡았다. 당시 수원부는 마병 6초(738명)를 포함하여 6,000명의 대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훈련도감보다 1,000명이 더 많은 막강한 병력이다. 그럼에도 수원부는 마병을 더 늘여야한다
               고 주장하였다. 마병의 필수무기인 마상편곤 1,000자루를 수원에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
                                                26)
               을 보면 병력이 더 늘어났을 수도 있다.



                 1750년 9월, 영조는 온양 온천으로 가는 길에 수원 독산성에 올라 임진왜란을 기억하며 눈
               물을 흘렸다. 독산성 전투는 조선왕조의 수명을 연장한 행주대첩의 전초전이기에 영조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때 영조가 승지 황경원에게 독산성의 군기(軍器) 상태를 점검

               하도록 지시하였다. 병기와 기치가 모두 낡아서 성을 지킬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은 영조는 즉
                                        27)
               시 개수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이때 독산성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6. 사도세자, 화산에 올라 효종의 원대한 뜻을 생각하다


                 영조가 독산성을 다녀간 지 만 10년이 지난 1760년 7월,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가는 길에

               독산성에 올라 하룻밤을 지냈다. 정조는 이때의 일을 <행록(行錄)>을 참고하여 특별히 상세하
               게 기록하였다.



                 “당시 소조가 오랜 병을 앓고 있어 영종께서 온천욕을 하라고 하셨다. 수레가 강변에 이르니
               물이 불어 뱃길이 좋지 않아 늦게야 비로소 건넜는데,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 등과 ‘임금은 배

               이고 백성은 물’이라는 말에 대해 서로 논의하였다. 이튿날 수원에 갔는데 그 북쪽에 있는 화
               산이 바로 기해년(1659)에 영릉(寧陵:효종릉)으로 치표한 곳이다. 거기 올라 사방을 두루 보며

               한참 동안 감탄하며 구경하고 산성(山城:독산성)으로 돌아와서는 무기(武技:무예)를 사열하였
                  28)
               다”


                 사도세자는 독산성에 올랐다가 효종의 능을 삼으려 했던 화산이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가 화





               26) <승정원일기> 1728년(영조 4) 4월 26일(병오)
               27) 영조26년(1750 경오) 9월 26일(을축)
               28) <홍재전서> 제18권 ‘현륭원의 행장’



               90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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