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5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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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조, 독산성에 나무를 심고 가꾸라
1792년 7월, 2년에 걸친 공사로 독산성은 새롭게 태어났다. 성의 둘레는 1,004보(步)에 달했
다. 전체 성 중에서 신축한 부분이 732보나 되었고, 수축한 부분이 272보였다. 수문(水門)은 3
곳을 새롭게 개축했고, 몸을 숨겨 사격할 수 있는 성가퀴 309보를 신축했으며, 지휘소 남장대
(南將臺)는 옛터에서 3척(尺)을 옮겨 다시 세웠다. 낡은 시설을 보수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
운 시설을 설치하고 기존 시설을 확장했던 것이다.
정조는 “독산성은 중요한 요해지이고 원침(園寢:현륭원)에서 가깝다”며 신하들에게 그 중요
성을 상기시켰다. “운주당은 세자가 머물러 숙박했던 곳이며 장대는 진남루(鎭南樓: 현 세마
대)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유서 깊은 곳”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국왕이 깊이 관심을 쏟는 곳
임을 강조해 철저히 관리하도록 했던 것이다. 천혜의 요새라 할지라도 평소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위기가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상시 독산성의 임무는 원침 현륭원과 신도시를 보호하는 두 가지였다. 정조는 이러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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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기록한 비문을 규장각 각신에게 짓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산성에서 토신(土神)에게 성
을 개축 보수한 사유를 알릴 때 쓰는 고유문과 제사에 사용될 물품의 규식까지 미리 정해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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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지시하고, 고유제 때 수원부사가 헌관을 맡아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민둥산이란 별명과 달리 독산성 주변에 울창한 숲이 조성된 것은 정조의 지시로 식목사업을
꾸준하게 펼친 덕분이다. 1792년부터 독산성에 소나무 벌목이 금지되고 식목사업이 정기적으
로 펼쳐졌다. 정조는 화산과 마주한 독산성과 수원 팔달산 주변에 아주 많은 나무를 심고 가꾸
었다.
이와 관련하여 눈여겨 볼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1789년 10월, 정조가 현륭원 정자각에서 하
룻밤을 지낸 다음날 아침 걸어서 주산(主山: 花山)의 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신하들에게
한 지시가 “이 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만큼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라는 것이
31) 정조16년(1792) 10월 3일(무진)
32) 정조16년(1792) 7월 18일(을묘)
독산성에 깃든 인화(人和)의 정신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