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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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았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의 보고에 따르면 1651년 당시 독성산성에 민가 40여 호
(戶)가 있었다. 22)
4. 숙종시대 독산성에 봉수를 설치하다
효종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독산성이 거론되지 않는다.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출범하면서
일본의 정치가 안정되자 왜구가 사라졌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대륙의 주인으
로 들어서면서 만주 지역도 평화가 찾아왔다.
독산성이 다시 조정의 논의에 등장하는 것은 1682년(숙종8)이다. 당시 청나라가 ‘삼번의 난’
을 평정한 뒤 조선을 압박하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이때에 독산성의 전력을 강화할 방안이 대
두되었던 것이다. 총융사 김익훈은 “수원부의 독성산성은 지세가 뛰어나 방어에 편리하지만,
지휘관이 상주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대책마련을 주장하였다. 이때 병조에서
별장(別將)을 선발해 독산성에 보내고, 총융청의 군향(軍餉)을 독산성으로 옮겨서 성안에 저장
하도록 하였다. 23)
경기도의 요충지 수원의 봉수체계가 허술하니 독산성에 봉수를 설치하자는 주장이 1690년
24)
에 나왔다. 수원 주위에서 가장 높은 독산성 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면 삼남에서 올라오
는 급한 경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60여 년이 지난 1754년에도 독산성에 봉수를
25)
설치하여 운영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를 통해 독산성에 설치한 봉수가 그리 철저하게 관리
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 영조, 독산성에 올라 임진왜란을 회고하다
영조(재위 1724~1776)는 1724년에 노론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탕평책을
펼치며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다. 그러나 1728년에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이인좌, 정희
22) <승정원일기>효종2년(1651) 10월 25일
23) 숙종8년(1682 임술) 5월 9일(병진)
24) 숙종16년(1690 경오) 4월 23일(갑신)
25) 영조30년(1754 갑술) 7월 23일(경자)
독산성에 깃든 인화(人和)의 정신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