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9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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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독산성이다.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는 경기도 방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총융청(摠
戎廳)을 설치했다. 잇따라 수어청(守禦廳), 어영청(御營廳)을 창설하여 중앙 군영이 네 개나 되
었다. 이괄의 난은 겨우 진압하였다. 하지만 내전으로 후금(後金) 방어를 책임지던 평안도의 1
만에 이르는 정예 병력이 대부분 희생되어 국방상의 큰 공백이 생겨났다. 후금의 방어벽이 완
전히 뚫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다는 허망한 명분에 사로잡힌 서인정권의
거듭된 실책으로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인화에 실패한 인조는 천혜의 요새 남한
산성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가 삼전도에서 적장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이며 항복하
는 치욕을 당했다. 역시 지리(地利)를 믿기보다 인화(人和)에 힘을 쏟았어야 했다.
수원 독산성은 병자호란 때 다시 주목을 받았다. 경기 방어사 구인후(具仁垕, 1578∼1658)
가 수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왕 인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하였다.
이 공으로 구인후는 어영대장에 올랐다. 인조는 수원 군사 3,000명에게 각각 무명 1필을 나누
어 주고, 장관(將官) 70명에게는 전복을 지을 옷감을 주었으며, 모든 군사들에게 술을 내려 수
고를 위로했다. 수원 군사는 속오군으로 급료병인 훈련도감 군사와 달리 옷과 양식을 스스로
마련하였으나 “임금이 거둥할 때면 즐겁게 달려온다”고 할 정도로 충성심이 높았다.
수원에 대한 조정의 기대와 신뢰는 더욱 커졌다. 구인후의 뒤를 이어 수원부사에 임명된 조
계원(趙啓遠, 1592~1670)은 군사수를 2,000이나 더 늘여 5,000명을 확보하였다. 이제 수원
의 병력과 훈련도감의 병력을 합하면 1만이 되었다. 조계원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의 진저우[錦州] 공격에 참가하게 되자 시종하여 모래주머니를 이
용하여 성을 쌓는 기발한 계책을 써서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이때부터 수원의 병력은 5,000명으로 고정되었다.
1639년에 수원 독산성을 크게 정비했다. 인조시대에는 훈련대장과 수원부사의 위상이 엇비
슷했다. 수원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임진왜란과 인조 초에 일어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1637) 때도 독산성은 남한산성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이후 독산성에는 기병 75호가 있었다. 보병은 군병 300명, 충
장위 28명, 충순위 5명, 모두 333명이었다.
18) 인조2년(1624 갑자) 3월 9일(계해)
독산성에 깃든 인화(人和)의 정신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