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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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선발하고 이들에게 오로지 나무를 심는 일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3. 정조의 죽음과 독산성의 성쇠



                  1800년 개혁군주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군사제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802년에
                노론 벽파의 주도로 장용영이 해체되었다. 5,000명의 정예 병력이 상주하던 수원 화성에 3초

                (약 360명)의 병력만 남겨 두었다. 평양과 함께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도시로서의 기능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임란 이후 독산성이 갖고 있던 군사적 요새로서의 역할은 완전히 사
                라졌다. 이제 독산성은 현 국왕 순조의 부왕 정조의 능-건릉과 현륭원이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1804년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규장각 각신이 건릉과 현륭원 분묘의 상태를 살펴보는 봉심

                (奉審)에 참여하였다. 김조순이 순조에게 능원(陵園: 건릉과 현륭원)의 일을 조목별로 진달했
                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독산성을 풍수적인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 동안 군사적, 전략적 차원에서 관리되던 독산성은 이제 현륭원과 건

                릉을 모신 화산의 기운을 북돋우는 풍수 대상이 되었다. 곧 ①독산성의 노적·양산 두 봉우리
                에 보토하는 것, ②독산성 서문 밖 양산의 여러 산록에 늘어서 있는 백성들의 무덤을 물자를

                보조해 주어 파서 옮기도록 하는 것, ③세람교에 나무를 심는 것, ④독산성 남쪽에 암문을 설
                                                                                    39)
                치하는 것, ⑤양산 동쪽 산록 및 독성 동문에 나무를 더 심는 것을 건의하고 있다.  ⑥만이 군
                사적인 의미가 있는 사업이다. 순조는 김조순이 요청한 다섯 가지 조항에 관련된 재정을 호조

                에서 지원하도록 허락하였다.



                  순조시대(1800~1834) 이후에는 겨우 유지되던 군사력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물론 수원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조선의 국방력은 왕실조차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추락하였다. 정조
                사후 정권을 잡았던 벽파들도 1806년에 제거되고 말았다. 이후 정권은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

                점하였다. 북벌의 대상이던 청나라와 권력이 밀착하였다. 국방을 위한 군사력은 사라졌다.







                38) <승정원일기> 1792년(정조 16) 2월 17일 (병진)
                39) 순조4년(1804 갑자) 10월 30일(을유)


                                                                    독산성에 깃든 인화(人和)의 정신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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