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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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화성궐리사 건립과 위상
화성유수부의 도시 육성을 추진하면서 정조는 자신의 친위도시로 육성되는 이곳을 조선 유
학의 상징도시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의 건국 주체들이 성리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성리학은 조
선의 중심 사상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 개혁의 중심지인 수원신도시에 공자를 배향하
는 국가 주도의 사당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闕里祠다.
24)
정조시대에 공자의 遺像을 파는 상인들이 등장할 정도로 공자에 대한 배향 의지가 높았다.
당시 지성균관사 황경원이 상인들이 파는 공자의 유상을 성균관 명륜당에 옮기기도 하였다.
황경원은 공자의 유상을 파는 것을 근절하려 하였는데 정조는 오히려 공자를 존숭하는 풍토가
나쁘지 않다고 그냥 허용하도록 하였다. 이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공자에 대한 존숭이 강하
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자 존숭의 분위기에서 정조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공자의 초상을 모시고 배향하
는 사당을 만들기로 하였다. 정조는 사대부들에 의해 건립된 충청도 尼城의 궐리사를 인정하
지 않았다.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일개 사대부들이 건립하여 제향을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尼城 의 궐리사도 역시 완전히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전국 3백 60군데의 군현에 다 공부자
를 제사지내는 곳이 있는데, 어찌 유독 이성에서만 향교 이외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설치한단 말인
가. 교화가 지극하지 못하고 풍속이 바르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이왕에 만들어진 사당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으나, 앞으로는 감히 옛 성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는 서원을 설치하지 못하
도록 예조의 관리에게 지시하여 각도에 공문으로 알리게 하라.” 25)
정조는 충청도 이성의 궐리사가 당파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탕평정
치의 일환으로 전국의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인정하지 않고 조정의 책임으로 운영될 궐리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새로운 신도시 수원에 만들어지는 궐리사가 단순히 공자를 배향하기 위
한 유학의 상징으로서만 건립된 것이 아니라 바로 탕평을 위한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향후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봉안하는 서원 역시 일체 하지 못하게 하는 하는 강경 조치
24) 『正祖實錄』卷16, 7年 8月 乙亥.
25) 『正祖實錄』卷32, 15年 6月 戊申.
72 김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