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3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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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이같은 결정은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팔달산으로 옮기기 이전부터 정조는 새로 이전
되는 새 읍터를 오래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현륭원의 천원과 읍치의 이전, 그리
고 신도시의 건설은 유형원의 선견지명과 경륜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8)
19)
수원도호부사 조심태는 수원도호부의 지리적 장점을 三南으로 통하는 요로라고 하였다.
舊 수원은 도성을 수호하는 도호부의 하나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사방이 산
으로 둘러 쌓인 효과적인 지세를 선택한 것이다. 사람의 원활한 소통보다는 도성을 지키는 군
20)
사도시답게 산으로 둘러 쌓인 패쇄적인 형세를 취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개활지
로 이동한 수원도호부의 중심지는 변화된 사회상의 반영으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장점이 있는 곳에 정조는 성곽을 건설하고 대도회로 육성시키고자 하였다. 화성 성역
21)
은 마침내 1794년(정조 18) 1월 15일 정조의 하명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자
신의 화성건설의 숨은 뜻을 온 신료와 백성들에게 나타내었다.
“이 사업은 수원부가 畿湖의 요충지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며, 5,000병마의 무리가 있다고 해서
하는 것만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仙寢을 위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行宮을 위한 것이다. 마땅히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덜어주는 것에 힘서야 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가
까운 일이 있다면 비록 공사가 하루를 못 가서 이루어진다 할 지라도 나의 본의는 아니다.” 22)
화성 성역은 단순히 도시 주변에 성벽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축성이 시작되면서 동시
에 행궁을 대대적으로 중축했으며, 또 도심부를 관통하는 하천의 준설과 가로의 정비도 함께
진행되었다. 성밖에는 저수지가 조성되었으며 서울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열렸다. 이러한 기반
시설 공사와 함께 驛村을 이전하고 시장을 건설하여 화성 신도시가 교통과 상품의 거점이 되
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이런 종합적인 작업이 화성 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으며, 이 작업
을 통해 화성은 비로소 하나의 대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23)
18) 『正祖實錄』 卷38, 17年 12月 丁卯.
19) 『正祖實錄』 卷30, 14年 5月 丁酉.
20) 김동욱, 위의 책.
21) 『正祖實錄』 卷39, 18年 1月 15日 癸卯.
22) 『華城城役儀軌』 卷2, 碑文 華城紀蹟碑.
23) 김동욱,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 돌베게, 2002.
오산의 궐리사 설립 추이와 역사적 의의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