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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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 있었다. 그래서 한성부는 主上의 수도이고, 화성은 上王의 수도인 兩京體制를 성립시키고
11)
자 함이었다. 결국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화성을 축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Ⅲ. 수원신도시 건설과 도시 발전 계획
1789년 7월 15일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도호부 관아 뒤편의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2)
난 직후부터 수원신도시 건설이 추진되었다. 정조가 수원을 자신의 정국구상의 핵심거점으
로 선택한 데는 두 가지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첫째, 수원이 삼남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군사상의 요지라는 점이다. 수원은 방비를 튼튼히 하고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성공적
으로 수행하게 된다면, 삼남의 튼튼한 배후지를 바탕으로 서울 이북의 가상의 적에 대해 장기
적인 측면에서도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지역이었다. 둘째, 수원이 교통
상의 요지로 타 지역에 비해 상업이 발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므로 단순한 군사거점 이상
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장점을 지니고 있는 수원지역을 정조는 조선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1790년(정조 14) 6월에 부사직 姜游가 수원신읍치에 성곽을 축성하여야 한다고 상소
하였다.
“수원은 곧 총융청의 바깥 군영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鎭이고 더구나 또 막중한 능침을 받드는 곳
이니, 의당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새읍을 옮겨 설치하였으나 城池의 방어설치
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번에 옮겨 설치한 것을 계기로 성지도 아울러 경영하는 것이 마땅하
다고 봅니다. 옛사람의 말에 ‘金城湯池’라고 한 것은 곧 참호를 설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산을 의지하여 쌓게 되어 참호를 설치할 수 없으
니, 이는 옛 제도가 아닙니다. 새읍은 이미 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므로 과연 성을 쌓고 참호를 설
치한다면 실로 성을 설치하는 조건에 맞을 것입니다.” 13)
11) 김준혁, 앞의 논문.
12) 『正祖實錄』 卷27, 13年 7月 己亥.
13) 『正祖實錄』卷30, 14年 6月 己未.
오산의 궐리사 설립 추이와 역사적 의의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