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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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화성건설과정에서 화성은 ‘사도세자의 원침을 호위하고 行宮을 보호하기 위해’건설

                되었다고 신료들에게 강조했다. 다시 말해 화성의 건설은 바로 사도세자의 복권을 통해 자신
                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고, 훗날 자신의 왕위 양위 후 거처 할 수원, 개혁정치를 실현할 군왕인
                본인을 지키고자하는 뜻을 보여준 것이다.             5)

                  정조는 惠慶宮이 칠순이 되고 왕세자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왕위를 아들 순조에게 넘겨주
                                                                                       6)
                고 자신은 현륭원과 가까운 화성행궁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는 계획을 가졌다.  정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으로 은퇴하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사도세자의 왕으로의 追尊 때문이었
                다.
                  정조는 자신이 국왕으로 있으면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었지만 선왕 영조와의 약

                속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물론 국왕으로서 생부인 사도세자를 추존할 수도 있었으
                           7)
                나 ‘繼志述事’ 를 기본 방침으로 내세우면서 영조의 정치적 뜻과 행위를 계승했다고 강조하는
                정조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는 일은 ‘壬午禍變’이 영

                조의 잘못된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국
                왕으로 즉위하던 날 작성한 綸音 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고민하는 모습이 잘 나타난
                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을 중요하게 여기시어 나에게 효장세자의 후사
                    가 될 것을 명령하셨으니, 예전에 선대왕께서 올린 상소를 보면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다(不貳本)

                    는 나의 뜻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인정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다. (사도세자에게 올리는) 饗祀의 절차
                    는 大夫로서 제사지내는 禮를 따라야 하며, 大廟와는 동일하게 할 수 없다. 혜경궁에 대해서는 경
                    외에서 올리는 공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어야 하겠으나, 대비와 같을 수는 없다. 有司로 하여금 대
                                                   8)
                    신과 의논하여 절목을 정하여 아뢰게 하라”

                  정조는 온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정조

                의 이 한마디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세력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느낌을



                5) 김준혁,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7. 155쪽.
                6) 1804년 왕위 양위에 대한 문제는 현재까지 구체적 논의로서 이루어지지 않고 다만 혜경궁의 ‘閑中錄’에 일부 기술된
                  내용으로 추정 할 따름이었다.
                7) 정조의 기본 정치이념으로 영조의 정치 사상 및 정치행위를 이어받아 정국운영을 하겠다는 뜻이다.
                8) 『正祖實錄』, 卷1, 卽位年 3月 辛巳.


                                                               오산의 궐리사 설립 추이와 역사적 의의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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