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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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을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사도세자를 일정정도 복원시
키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 벽파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사도세자의 완전한 복권을 주장하지 못
하였으며, 국왕과 세자와의 位格에 분명한 차등을 두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복권하는 최선의 선택은 자신이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으로 내려가는 길
이라고 판단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뜻을 수차례에 걸쳐 혜경궁과 신하들에게 강조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데 혜경궁에서 지어 내려보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정조의 말씀이 있습니다. ”元子
가 나서 甲子年이 되면 15살이 되어 임금의 자리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니 임금 자리를 전한 후에 나
는 어머니를 모시고 華城으로 옮긴다면 景慕宮에서 시행하지 못한 일도 펼칠 방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영조의 지시를 직접 받았으므로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끝없이 원통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의리이다. 오늘 여러 신하들이 나의 의리를 따라서 감히 의논하지 못하는 것도 의리이며 다
른 날 여러 신하들이 새 임금의 의리를 따라 받들어 가는 것도 역시 의리이다‘ 그리고 현륭원의 誌
文을 친히 지었는데 거기에 씌여 있기를 ‘맏아들을 기다려서 중대한 일을 맡겨 크게 보답하는 소망
과 축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9)
정조는 영조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양위뿐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1789년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원으로 옮기는 순간부터 순조
를 낳아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고 하였다. 정조의 화성 건설을 통한 양위 의지는 현륭원 천봉
이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0)
정조는 화성축성에 대하여 “현륭원을 보호하고 행궁을 호위하기 위함” 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곧 국왕 자신을 변란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즉위초
부터 시해사건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왕권강화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
의 변란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사전에 수원신읍치를 육성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
화하기 위해 자신의 배후도시를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앞서의 설명과 같이 장기적으로
부친인 사도세자를 추존하기 위한 포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정조는 1804년 왕위를 물려주고 세자였던 순조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아 子王이 祖父인 사
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케 하고 자신은 수원에서 上王으로 국정을 경영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
9) 『高宗實錄』 卷39, 36年 8月 3日.
10) 『華城城役儀軌』卷2, 節目, 守城庫節目.
68 김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