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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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에 있어 보통 예와는 달리해야 할 것이니 도백으로 하여금 궐리 옛터에다 집 한 채를 세워 내
각에 있는 聖像을 모시게 하고 영당에 모셨던 진영眞影도 모셔다가 함께 봉안하고서 이름을 궐리
사라 하라. 사우의 편액은 써서 내리겠다. 봄·가을로 지방 수령에게 香과 祝을 내려 제사를 모시
게 하고 제사에 쓰이는 제수들은 대략 이성(尼城) 궐리사(闕里祠)의 예대로 시행하되 한사코 정갈
하고 간략하게 하라. 그렇게 하고 나면 이른바 새로 세웠다는 영당은 고을 유생들이 사사로이 세운
것에 불과하고 또 간직했던 영정마저도 함께 봉안하였으니 재목이며 돌들도 당연히 이곳에다 옮겨
세워야 할 것이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제향을 드릴 일이겠는가. 서원 지키는 재생(齋生)에 있어서
도 그 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공씨를 시키도록 하고 다른 유생은 감히 섞이지 못하게 하여 시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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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도록 하라. 이 전교를 써서 강당에다 게시하라.”
정조는 궐리사가 공서린의 생가 옛터에다 만든 것임을 밝혀주면서 봄과 가을에 화성유수로
하여금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아예 새겨서 강당에다 게시하게 하라
고 하였다.
정조는 궐리사의 운영을 위하여 有司 1명과 장의 2명 색장 1명을 두게 하였다. 화성유수부
전체에 유사는 향교 1명과 서원에 2명 등 전체 4명이었다. 더불어 장의도 8명인데 궐리사에 2
명을 두었고 색장도 전체 4인중에서 궐리사에 1명을 둔 것이다. 정조는 궐리사에 임명된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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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 색장 모두를 공씨로 선정하여 임명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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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이어 창덕궁 摛文院에 있던 공자의 眞本을 화성의 궐리사로 옮겨 모시게 하였다.
더불어 제향의식을 정비하였다. 처음에는 화성 궐리사의 제향의식이 따로 없어 노론들이 세운
이성의 궐리사 제향을 따르게 하였으나 건립 후 예조의 요청으로 곧바로 궐리사 제향 의식의
절차를 하교하였다.
“祭品은 보(簠)·궤(簋)·변(籩)·두(豆)를 각각 하나씩 하고 술잔을 셋으로 하며, 폐백은 없고 축문
은 있게 하라. 축문과 香은 봄가을로 내려 보내고, 공씨로서 대대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서 항렬이 높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 번 술잔을 드리게 하고, 또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축문을 읽게 하며, 또 몇 사람으로 집사를 삼도록 하라.
향과 축문을 조정에서 내려주는 경우 일반 다른 제사와는 색다른 점이 있어 유생으로서는 그 제사
30) 『正祖實錄』卷36, 16年 10月 戊辰.
31) 『華城誌』卷1, 儒任.
32) 『正祖實錄』卷37, 17年 6月 乙酉. 현재 오산의 화성궐리사에 모셔져 있는 공자의 진본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당
대 최고의 초상화사인 이명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74 김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