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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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벌희가 백제 침류왕 여전의 어머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대목은 일본서기 神功皇后-
38)
氣長足姬尊 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AD 399년 영락 9년, 고구려 광개토왕은 신라견사 백왕白王의 간청을 듣고 왜를 칠 계획을
신라 내물왕에게 은밀히 전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신라의 국경에 들어와 성城과
못池을 무너뜨리는 왜倭를 물리 칠 전략이었다.
AD 400년, 영락 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은 신라에 들어온 왜를 다시 친다. 이러한 까닭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의 지배하에 들어 간 백제의 왕족과 호족들이 바다를 건너 왜로 망명한 것으
로 보인다. 열도로 건너 간 백제의 호족들은 한반도에 거주하던 마한馬韓=利濟의 세력이다.
AD 405년, 백제 아신왕 여방餘芳이 재위 14년 만에 죽었다. 이에 열도에 머물러있던 태자
직지는 부왕의 부음을 듣고 곡읍을 하며 왜군의 호위를 받고 환국하였다. 선왕 아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백제 제18대 전지왕腆支王 여영餘暎이었다.
전지왕 14년 여름, 왕이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백면白綿 10필을 보냈다. 이때의 백면은 아마
도 백라白羅 비단을 그렇게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바, 이것은 왜 응신천황 예전의 장례용 물품
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7. 국중國中의 명당 수원고읍성 터
1) 현융원顯隆原은 국중의 명당
현융원과 용주사가 자리잡은 수원고읍성터는 국중國中의 명당明堂으로 불린다. 조선 정조
임금과 고산 윤선도는 봉황의 벼슬을 닮은 화산花山을 천하의 명당으로 보았다. 촛불을 밝힌
듯한 독산禿山 향로봉과 구천狗川이 감돌아 흐르는 수원고읍성터를 국중의 명당으로 보고 이
곳에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유택을 마련하였다.
풍수지리학상으로도 화산은 빼어난 길지임에 틀림없었다. 모름지기 명당이란 배산임수背山
臨水의 지세여야 하는데 이곳은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조선 정조임금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묻힌 사도세자의 유택을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의 수원고읍성水原古
邑城 터로 이장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수원고읍성의 주민을 지금의 수원시 팔달산 서쪽
으로 옮기는 한편, 팔달산 동쪽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을 짓고 화성華城을 축성하였다.
38) 神功皇后-氣長足姬尊, 완역 일본서기, 전게서, 149~169쪽.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