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오산학 연구 1집
P. 52

支는 불과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였다.

                 광개토왕비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광개토왕비문 제2면 6~8행의 기록이다.
               사코가게노부酒勾景信의 ‘광개토왕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에 의한 필자의 석문이다.


                   6 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7 通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8 侍遣使還告以密計


                   영락 9년 기해년, 백잔(百殘)이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을 순시할 때 신라견사
                   백왕이 와서 고하길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와서 성과 못을 무너뜨리니 노객으로 삼은 인민을

                   돌보아 주실 것을 태왕께 청하여 명을 기다렸다. 태왕께서 신라의 충성을 은혜롭게 여겨 신라의 사
                   신을 돌려보내면서 은밀한 계략을 전하였다.


                 이 기사는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 광개토왕을 배반하였다는 기록이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
               일까? 무슨 까닭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무릎을 꿇고 맹세한 서약을 어긴 것일까? 백제 아

               신왕이 왜 응신천황에게 왕자 직지直支를 보내 화통和通한 것은 목숨을 건 행위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우리의 속담이다. 왜 응신천황 예전譽田=餘田
               이 백제 아신왕 여방餘芳의 아버지요, 백제 왕자 여영餘暎의 할아버지인 까닭이다.

                                                       36)
                                                                                    37)
                 또 다른 근거는 백제 전지왕의 비妃 팔수八須 와 왜 응신천황의 황녀 팔전八田 의 이름에
               있다. 전지왕의 비妃 팔수八須부인의 이름에 근구수왕 여수餘須의 須자가 들어있고 응신천황
               의 황녀 팔전八田의 이름에 응신천황 예전譽田의 田자가 들어있다.

                 왕비 팔수와 황녀 팔전의 이름은 백제 근수수왕과 왜 응신천황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돌림자
               로 추정된다. 왕족끼리의 근친결혼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왜 응신천황 예전譽

               田이 백제 침류왕 여전餘田이라는 가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 해도 백제 침류왕 여전餘田이 열도 응신천황 예전譽田이
               라는 주장이 어떻게 가능할까?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에도 제14대 중애천황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응신천황 예전을 낳은 신공황후 기장벌희가 임나가라(부산
               시 기장구 기장벌) 출신의 기장벌희氣長足姬라면 위의 상황은 급격히 달라진다. 신공황후 기





               36) 팔수八須, 삼국사기(하), 전게서, 51쪽.
               37) 팔전八田, 일본서기, 전게서, 193쪽.



               50  임종삼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