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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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묘를 수원고읍성터로 옮기고 현융원顯隆原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사찰 갈양사를 개축하여 사도세자의 영면을 기원하는 용주사龍珠寺로 조
               성하였다. 정조대왕은 울창한 소나무 숲과 백제 때의 토성으로 둘러싸인 수원고읍성을 천하의
               명당으로 보았던 것이다.

                 정조임금은 고문서를 통하여 수원고읍성터가 백제 구원행궁이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음직하
               다. 그가 경기도 수원에 화성행궁과 화성을 쌓고 신도시 수원을 건설한 것과 수원고읍성터에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능묘를 쓰고 현융원을 세운 것과 기전영지에 독성려왕릉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넉넉히 짐작이 가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침을 쓰기 전까지 이곳 화성시 안녕동 화산리는

               수원읍성이었다.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국의 화산에 수원읍성이 토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최초 이곳 수원고읍성은 마한 58국의 하나였던 마한 모수국牟水國의 도읍이었다. 그러다가
               백제의 영토로 흡수되면서 백제 제16대 진사왕 대에 이르러 구원행궁으로 불리었고,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면서 매홀현買忽縣, 통일 신라와 고려시대에 이르러 수성군水城郡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성군은 수원군으로 명칭이 바뀌고 정조대왕에 이르러 수원읍성은 지
               금의 수원시 팔달산으로 읍치를 옮겨 가면서 수원고읍성으로 개칭되었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능묘인 융건릉에는 백제시대의 토성이 산 능선을 따라 아늑하게 축
               성되었다. 토성의 동쪽은 화산의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져 내성內城을 이루고 토성의 서

               쪽은 화산의 능선을 따라 수원대학교 담장으로 이어져 외성外城을 이루고 있다. 수원고읍성의
               토성은 이곳에 융건릉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더 잘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백제시대의
               토성은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능묘를 아늑히 감싸고 있다.

                 구원행궁의 자리로 추정되는 수원고읍성터(현융원)에서 백제 초기의 유물이나 유적을 찾아내
               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조대왕이 이곳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삼국시대의 돌 다루는 형태의 치석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었다.
                 그 흔적은 건릉 앞을 흐르는 수로의 돌다리 받침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건릉 앞을 졸졸 흐
               르는 도랑 수로의 밑받침 개석이 외지에서 반입한 화강암이 아니라 이곳에서 출토되는 토석土

               石이라는 점이다. 또한 원석에서 돌을 떼어 낼 때 삼국시대의 돌 다루는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것이 구원행궁의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춧돌일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
               러나 조선시대에 장헌세자와 정조대왕의 능묘를 조성하면서 외지에서 다듬어 들여온 돌과는

               확연히 다른 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52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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