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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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진남루의 사대射臺에 올라 여러 발의 화살을 쏘았다. 정조대왕이 활을 쏜 것은 임진왜란의
뼈아픈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이렇듯 도성과 산성,
행궁과 산성은 왕의 신변을 수호하는데 상호보완의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진사왕 여휘餘暉는 왜 응신천황 예전譽田=餘田과 백제
아신왕 여방餘芳의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백제 북변의 석현성을 비롯한 10여 성과 백제 북
진의 요충 관미성을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잃고도 나아가 싸우지 않는 진사왕 여휘의 무능력을
문책하여 시해하였던 것이다.
백제 진사왕 여휘가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며 머물렀다는 기록에서 그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진사왕 여휘는 구원(수원)에서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을 되찾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
다. 왜 응신천황 예전이 보낸 왜군들과 힘을 합쳐 관미성 탈환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가 구원행궁狗原行宮에 머물러 있었던 까닭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구원행궁이 백제 관미
성(강화읍성) 탈환을 위한 전초기지 당항성(남양만)의 배후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구원행궁
이 서해 바다의 요충 당항성에 이르는 길목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왜왕 응신천황이 보낸 왜
장 기각숙니, 우전시대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를 맞아들이기 좋은 위치이기 때문이었다.
백제 진사왕 여휘와 조카 여방, 그리고 백제의 귀족이었을 왜장들은 백제의 구원행궁에서
고구려에 빼앗긴 관미성 탈환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2)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실체는 통봉通峰
백제 진사왕 여휘는 구원행궁에서 정적들에게 살해되었다. 조카 여방과 왜왕 응신천황이 보
낸 왜장들에게 시해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유해는 백제의 도성 한성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
이다. 그것이 정적들이 노린 절호의 기회이자 의도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고구려에게 빼앗긴 관미성 회복을 꾀하였던 백제 진사왕 여휘
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조카 여방(아신왕)과 왜왕 응신천황 예전을 추종하는 혁명군
의 손에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백제 진사왕 여휘는 독성산성 부근의 장록에 쓸쓸
히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백제 진사왕 여휘가 사냥을 하다 낙마하여 구원행궁
狗原行宮에서 죽었다고 공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밝은 세상에 비밀스런 거짓이란 오래가
지 못하는 법이다. 백제기를 그대로 옮겨 쓴 일본서기에 그 단서가 명확히 남아 있으니까 말이
다.
56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