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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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전영지와 정조실록의 기록을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필자의 연구에 다소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된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독성려왕릉과
구원행궁을 허구적인 기록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백제 진사왕이 구원행궁
에서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시해되었고, 그의 이름이 여휘餘暉였으며, 독성산성과 보적사는 백
제의 성책이며 사찰이었고 도성과 산성, 행궁과 산성을 가까이 두어 난국에 대비하는 것은 삼
국시대 도성 구축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시대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온양 온천 행차의 노정에서 묵은 곳이 독성
산성 운주당이었으며, 군장 이두섭이 장헌세자(사도세자)에게 독성려왕릉에 대하여 보고한 기
록이 뚜렷이 남아 있고, 정조대왕이 독성산성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쏟았기에 더욱 그렇다.
정조임금은 독성산성을 수리하고 나서 독산禿山의 토지신土地神에게 올릴 제문祭文과 비문
碑文을 직접 지어 내렸다. 그리고 경기도 관찰사인 수원도호부의 부사에게 해마다 제향하는
일을 거르지 않도록 하였다.
정조임금은 무슨 까닭으로 해마다 독산의 토지신에게 제향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을까? 백제
진사왕의 유택과 구원행궁을 빼앗은 무례에 대한 사과의 표시였을까? 제문과 비문을 지어 내
린 정조임금은 어쩌면 독성려왕릉과 구원행궁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전영지의 기록
과 정조실록의 기록을 마음에 새겨 둘 일이다.
독성려왕릉은 수원도호부 남쪽 삼십리에 위치한 독성산성에 있다. 경진년 장헌세자(사도세자)께서
온양 온천 행차시 산성에 이르렀을 때, 군장 이두섭이 이곳에 어떤 고적이 있다고 아뢰었다. 장헌
세자께서 산성의 진남루에 오르자 군장 이두섭이 그 일에 대하여 아뢰었다. 본부 중 진남루 아래의
산기슭을 가리키며 이곳에 한 개의 큰 무덤이 있는 바, 옛부터 여왕릉이라 불린다 하였다.
정조 14년 2월, 독성산성에 행차해서 장대에 임하고 운주당(運籌堂)에 이르러 산성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하였다. 상(上)이 경진년 온행(溫幸)중에 독성에 들러 운주당에 숙소를 삼고 진남루에 하
림(下臨)하여 활을 쏘니 연달아 네 화살이 맞았다.
정조 16년 7월, 독성산성을 수축(修築)하고 토신(土神)에게 고유(告由)토록 하였다. 고유제품(告由
祭品)과 제문(祭文)의 격식을 정하여 부사(府使)가 헌관(獻官)이 되고 중군(中軍) 및 부내(府內) 당
상관(堂上官)이 추천한 조신들이 다음 헌관이 되었다. 향(香)과 축문(祝文)인즉 향관(香官)이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전하고 경기감영 정문찰방(定文察訪)이 대축관(大祝官)을 겸(兼)해서 이 행사를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