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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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맺는 말





                1.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


                1) 백제 진사왕辰斯王 여휘餘暉의 무덤



                  필자는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를 백제 제16대 진사왕辰斯王 여휘餘暉의 무덤으로 본
                다. 독성(독성산성) 주변에 묻힌 백제 진사왕 여휘의 무덤 ‘독성여휘왕릉禿城餘暉王陵’이 1600

                년의 세월동안 구전되면서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으로 변형되었을 것으로 본다.
                  AD 392년,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한수 이북의 10여성과 백제 북진의 요충 관미성을 잃은 백
                제 진사왕은 구원행궁에 머물러 관미성 회복을 꾀하였다. 그러나 고토故土 회복을 꾀한 백제

                진사왕의 노력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조카 여방(아신왕)과 왜倭 응신천황 예전(여전)이 진
                사왕을 시해하였기 때문이었다. 한수 이북의 10여 성과 백제 북진의 관미성을 잃은 실정을 물
                어 그를 제거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 고토 회복을 준비하다 혁명군에 쫓긴 진사왕 여휘는 급히 독성산성으로 피신하였을 것
                이다. 구원행궁에서 1㎞ 지척에 있는 독성산성이 그의 몸을 의지할 유일한 요새要塞이었을 것

                이다. 그러나 진사왕 여휘는 다시는 도성 한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조카 여방과 왜장들에
                포위되어 독성산성에서 살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제왕들은 도성과 산성을 쌍둥이로 구축하였다. 도성 부근에 산성을 구축하여 도

                성 위협의 국난에 대비하였다. 고구려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백제의 한성과 남한산성, 신라의
                월성과 남산신성이 바로 그것이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도성을 호위하는 산성을 두었는

                바, 도성이 위태로우면 산성으로 옮겨가서 싸움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도성과 산성
                의 축성 양식은 백제 구원행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정조대왕도 봄, 가을로 온양 온천으로 행차하였다. 사도세

                자와 정조대왕은 온양 행차 중에 독성산성에서 묵었다. 혹여 왕을 해치고자 하는 불순한 자들
                의 습격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그 흔적은 지금의 수원 화성행궁으로 남았고 온양행궁의 유적
                으로 전해진다.

                  수원행궁이 건축되기 전, 사도세자(장헌세자)와 정조대왕은 이곳 독성산성의 운주당에서 묵
                었다. 왕의 신변을 호위하기에 독성산성은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정조대왕은 독성산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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