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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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는 조선 정조 때에 보경화상(寶鏡和尙)이 백성들로부터 8만 1천 냥의 시주를 받아 용주사를
                   완공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의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 절의 이름은 정조가 이

                   절의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꾼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용주사의 말사 보적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산의 봉우리에 위치한 보적사는 백제시대의 절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의 장경사도 이처럼 군진
                   속에 있는 사찰인데 이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사들에게 부처님의 가호를 빌어주는 등의 사기
                   앙양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시대에도 조선 정조임금은 부친 사도세자의 영면을 위한
               원찰願刹을 세웠다. 신라시대의 사찰 갈양사를 개축하여 화산 용주사를 지었다.
                 불사를 일으켜 죽은 자의 원혼을 위로한 예는 아마도 고구려 광개토왕이 처음일 것이다. 왕

               은 백제의 북진을 빼앗는 관미성전투에서 많은 싸울아비들을 잃었다. 사면이 절벽으로 싸여
               있고 바닷물로 둘러있어 백제의 관미성을 함락시키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군사를 7도로
               나누어 20여 일간의 전투 끝에 관미성을 겨우 함락시키고 돌아와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세웠

               다. 일명 영묘구사靈廟九寺였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과 문무왕, 신문왕이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신라의 융성을 위하여 황

               룡사구층목탑을 세우고, 선왕의 영면을 위해 사천왕사四天王寺와 감은사感恩寺를 세우고, 에
               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였다.
                 선덕여왕은 이미 죽기 전에 내 무덤은 도솔천 위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후에 여왕의 묘

               소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또한 문무왕은 장차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
               으니 화장하여 바다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 후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

               는 사찰 감은사를 감포 앞바다에 세웠다.
                 고려에서는 불사를 더욱 크게 일으켰다. 왕자들이 자진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팔만대장경판
               을 제작하여 국가의 태평성대太平聖代와 백성의 함포고복含哺鼓腹을 빌었다. 또한 수많은 원

               찰과 불탑과 범종을 나라의 곳곳에 세웠다. 이렇듯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죽은 자의 영혼
               을 위하여 불사를 일으키는 유풍이 더욱 짙었다.
                 이런 일들로 미루어 보면 두 사찰의 성격은 분명해진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영혼을 위로

               한 사찰인 것을 보면 보적사도 어느 왕의 영면을 위해 세워진 능사일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
               니한 일이지만 지금의 독산 보적사는 독산(대머리산)을 빼어 닮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 처가
               의 시주로 복원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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