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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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신천황 7년 가을 9월, 고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같이 내조하였다. 무내숙니에게 명하여 제
한인들을 거느리고 저수지를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그 저수지 이름을 한인지라 하였다.
이 기사는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쫓겨 열도로 망명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영락 6년 광개토
왕이 토討한 백제百濟와 이제利濟의 세력이 바다 건너 왜로 망명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백잔百殘과 이잔利殘은 열도로 망명하지 못한 세력을 의미한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지배에 들
어간 백제百濟와 이제利濟의 잔존세력을 의미한다. 장將, 잔주제殘主弟, 대신大臣 열 명을 인
질로 잡았다는 광개토왕비문의 기록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34)
다음은 일본서기 응신천황 8년 봄 3월의 기록이다. 그런데 그 표기가 정말 놀랍다. 왜倭
응신천황 예전이 백제왕의 입장에서 빼앗긴 영토를 기술하는 것이다. 백제 아화왕이 무례하여
‘나의(我) 땅을 고구려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화不和하였는데 백제 아화왕이 왕자 직
지를 왜 응신천황에게 보내어 선왕先王의 수호修好를 다시 하였다는 것이다. 설명을 덧붙이면
백제 아화왕 여방이 아버지 응신천황(침류왕) 예전(여전)에게 손자 직지(여영)를 보내어 선왕
(부왕)의 수호修好를 다시 하였다는 것이다.
八年 春三月,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及峴南,支侵,谷那,東
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先王之好也
8년 봄 3월,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하였다. 그래
서 나의 땅 침미다례(강화도), 현남(경기,충북), 지침(충남서부), 곡나(황해북도), 동한(강원도)을 빼앗
겼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냈다. 이로써 선왕의 자상함을 다시 찾았다.
이 사건은 백제 침류왕 여전餘田이 왜 응신천황 예전譽田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
록이다. 응신천황 예전이 ‘나의 땅을 빼앗겼다’고 말한 기록을 특별히 눈 여겨 보아야 할 이유
가 여기에 있다. 왜倭 응신천황 예전譽田을 백제 침류왕 여전餘田을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백제 15대 침류왕 여전餘田과 왜倭 15대 응신천황 예전譽田은 세위世位도 제15대로 똑같다.
반도의 백제왕과 열도 왜왕의 세위가 똑같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백제 침류왕과 倭 응신
천황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34) 응신천황, 완역 일본서기, 전게서,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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