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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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영락 6년 한반도는 사실상 고구려 광개토왕에 의해서 삼한통일이 이루어진 상황이었기 때

                문이다. 신라의 왕과 인민은 고구려의 신민臣民이었고 백제의 왕과 인민은 고구려의 노민奴民
                이었던 것이다. 이 기록은 중국 집안에 위치한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 근거하는 것이다.
                  둘째, 광개토왕이 정토征討한 대상이 이잔利殘=利濟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잔利殘은 백

                제를 돕는 이제利濟를 가리키는 것이다.
                  백잔百殘과 이잔利殘은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한다. 광개토왕비 제1면 8행에 백잔百殘

                이 등장하고 광개토왕비 제1면 9행에 이잔利殘이 등장한다.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이제利濟는 한반도의 선주민이다. 한성 백제를 돕는 마한馬韓=利
                濟의 세력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신라는 이잔利殘=馬韓의 토경을 백제의 토경으로 인정하

                지 않았던 것이다. 이잔利殘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가 아니라 마한의 영토이었기 때문이
                다. 그런 까닭으로 고구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제1면의 기록과 일본서기日本書紀 응신천황
                應神天皇 7년의 기록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음은 고구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제1면 8~10행의 기록이다.


                    8 百殘新羅舊是屬民

                    9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東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軍至
                    10 南攻取壹八城臼模盧城…


                    백잔(百殘)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하여왔는데 왜를 신묘년에 불러오므로 바다를 건
                    너가 백잔(百殘)을 깨부수고 동예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6년 병신년에 왕은 수군을 궁솔하여

                    이잔(利殘)을 討하였다. 국군이 남에 이르러 일팔성 구모로성 등을 공취하고…


                  위의 기록에서 백잔百殘은 百濟, 이잔利殘은 利濟의 다른 표기이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취
                攻取에 정토征討된 세력이다. 열도로 망명하고 남은 백제와 이제의 잔존殘存 세력이다.



                  다음은 일본서기 제15대 응신천황應神天皇 7년 가을 9월의 기록이다. 응신천황 7년은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 6년으로 광개토왕이 백제 이잔의 58성을 공취한 해이다.

                    應神天皇 七年 秋九月,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羅人, 竝來朝, 時命武內宿禰, 領諸韓人等作池,
                    因以, 名池號韓人池.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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