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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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할미성대동제는 백제 건국 설화와 일치하는 모티브를 갖고 있다. 가뭄 9년으로 농사짓
기 어려움과 고구려를 떠나 백제를 세우기 9년간의 어려움, 성 쌓기 내기에 실패하여 죽은 아
들과 도읍 세우기 내기에 실패하여 죽은 아들 비류, 남쪽과 북쪽의 두 성을 이어 쌓지 못한 아
쉬움과 비류와 온조 형제가 미추홀과 위례성으로 갈려 통합하지 못한 아쉬움, 죽어서 성주산
의 산신이 된 마고할미와 죽어서 백제의 시조모가 된 노고 소서노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갖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할미성대동제는 용인시와 용인문화원 그리고 남자 무당 유성관에 의하여 해마다 재현된다.
필자는 용인 할미성대동굿의 마고선인을 백제의 시조모 소서노召西奴에 비정한다.
5. 관미성關彌城과 각미성閣彌城의 위치
1) 삼국사기의 관미성關彌城
32)
관미성關彌城 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 등장한다. 관미성의 위치는 정확히 밝
혀져 있지 않다.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빼앗긴 백제 관미성의 위치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
분하다. 벽란도, 오두산성, 교동도로 주장이 엇갈린다. 삼국사기를 역주한 이병도는 관미성關
彌城의 위치를 강화도에 딸린 교동도喬桐島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각미성閣彌城을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관미성關彌城으로
석문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잘못된 석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관
미성關彌城을 공취한 것은 AD 392년 영락 2년의 일이고,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각미성閣彌
城을 공취한 것은 AD 396년 영락 6년의 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미성의 ‘각閣’과 관미
성의 ‘관關’은 그 의미가 다르다. 閣에는 ‘문설주, 싣다’의 의미가 들어 있고 關에는 ‘빗장, 닫다’
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필자는 사면초절四面峭絶하고 해수환요海水環繞하다는 백제의 관미성을 강화도 강화읍성
江華邑城으로 본다. 강화읍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닷물이 빙 둘러 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꼭 들어맞는다.
관미성關彌城으로 보는 강화도에 초지진과 광성보, 갑곶돈대가 있다. 조선말 양이洋夷를 물
리치고자 쌓은 바닷가 진지이다. 초지진과 광성보, 갑곶돈대에 ‘바닷가의 빗장을 닫다’는 의미
32) 관미성關彌城,삼국사기(하), 전게서, 48쪽.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