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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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제거하였다.

                 백제 침류왕은 근구수왕 여수餘須의 원자이자 아이阿尒부인의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
               러나 제위 18개월 만인 이듬해 11월에 왕위를 버렸다. 그러므로 백제 침류왕枕流王의 명칭에
               서 ‘바다를 흘러 간 통나무 왕’이라는 의미를 떠올리는 것과 왜왕 응신천황 예전譽田의 이름에서

               ‘옛 이름은 전田’ 곧 ‘여전餘田’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백제 제15대 침류왕은 분명 수
               수께끼의 인물이다.

                 왜왕 응신천황과 백제 진사왕, 아신왕의 관계는 매우 미묘한 사이였다. 결국 왜왕 응신천황
               예전이 침류왕의 태자 여방을 왕위에 올렸다는 것은 그가 아신왕 여방의 편에 섰다는 것을 의
               미한다. 그러므로 왜왕 응신천왕 예전은 곧 백제 아신왕 여방의 아버지인 침류왕, 바로 그 자

               신일 가능성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부자간의 촌수는 1촌이지만 형제간의 촌수는 2촌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침류왕과 진사왕은 배다른 형제였던 것이다.
                 백제 제17대 아신왕阿莘王,阿芳의 이름은 여방餘芳이다. 그는 제15대 침류왕의 원자元子이

               며 제16대 진사왕의 조카이다. 나이 어린 탓으로 숙부 여휘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왜왕 응신
               천황의 도움으로 숙부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AD 396년 병신년은 백제 아신왕 5년이자 고구려 광개토왕 6년이며 왜 응신천황 7년이다.

               이 해에 고구려 광개토왕 담덕은 수군을 궁솔하여 백제 이잔의 58城 700村을 노획하였다. 이
               른 바 인천상륙작전에 비견되는 해상침투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고구려 광개토왕이 구사한 이

               래 나·당연합군의 소정방이 썼고, 고려 태조 왕건이 썼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또다
               시 구사한 전략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략에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왕의 노객이 될 것을 무릎 꿇어 맹세한다.

               이어 남녀생구 1천과 세포 천 필을 공물로 바쳤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왕은 종족의 예로써 백
               제 아신왕 여방의 항복을 받아드린다. 왕의 아우, 신하, 장수 등 10여 명을 인질로 잡고 아신왕

               을 용서하였다. 그런데 이 기록은 고구려 광개토왕 훈적비문에만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을 명확히 밝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다음
               과 같이 추측할 수는 있겠다.

                 첫째, 삼국사기를 편집한 김부식이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듯하다. 그는 신라왕족으로
               서 신라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크게 다룬 반면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축소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면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왕가의 위업이 빛을 잃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초도初都 홀본忽本을 졸본卒本으로 낮추어 기록하였다. 그
               러나 집안 고구려 광개토왕비는 고구려의 초도를 분명 홀본忽本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AD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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