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1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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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백제가 지배권을 행사하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 백제와 신라의 협공으로 백제가 성왕 때 일시적으로 다시 지배권을
되찾았으나 신라에 이 지역을 빼앗기면서 그 후 오랫동안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부산동은 오산시의 가장 동쪽마을로 기록상으로 오산시의 마을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랜 마을로
보인다. 『삼국사기』권 제 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5년(AD238년 2월조)에 의하면 “왕은 부산(釜山)
에서 사냥을 하고 50일만에 서울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이런 기록을 근대 역사학자
들은 모두 진위(振威)를 부산으로 해석하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현재의 평택시는 예전
에 평택부(平澤府)였고, 그 전에는 진위현((振威縣)이었으며, 진위현 전에는 부산현이었다. 이런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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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가지 문헌으로 보아 부산동의 역사는 1700년 이상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오산 지역을 점령한 이후 76년간 이 지역을 당성군(唐城
郡) 부산현(釜山縣)의 일부 지역으로 지배하였다. 고구려가 오산 지역을 지배한 시기는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長壽王)때다.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南北朝)와 교류하면서 남하정
책을 강행하여 신라와 백제에 압력을 가하는데, 그때까지의 강대국이었던 백제가 그 목표였던
것 같다.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남으로 천안~남양~아산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오산이 고구
려의 지배를 받았다는 근거다. 고구려는 진위 지역에 부산현(釜山縣)을 설치해 다스리다 신라
와 힘을 합친 백제 성왕에 의해 다시 빼앗겼다(551).
한주의 속군현(屬郡縣)이었던 오산시와 화성시를 포함한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은 당
은군(唐恩郡)으로, 지금의 오산 일부와 진위 지역에 해당하는 고구려 때의 부산현(釜山縣)은
진위현(桭威縣)으로 개명됐다.
1. 부산동(釜山洞)의 마을과 지명
한자로 부산동은 가마(釜)와 뫼(山)로 마을의 모양이 가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라고 한다. 부산동은 현재에도 주로 논농사를 짓고 있으며,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
시화로 인해 개발은 진행되고 있지만 그래도 부산동은 비교적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
14) 『오산시사』下, 오산시, 1998, 684쪽.
한국의 무속과 경기도당굿 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