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0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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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 혁신이후, 하루 아침에 그 쇠망을 맞이하여 오늘날에는 불과 전남의 여러 곳에서 모질게 형
                   체만 남기고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 신청 설립과 계 성립의 목적과 정신은, 나주 신청의

                   선생안에서 본 바와 같이 계원이 각각 그 성이 다르더라도 정의는 동생사촌의 동족과 같다. 그 선
                   생안을 세사지내는 것은 동족의 조상을 세사지내는 정신으로 행하였다. 이렇게 집단의 통제를 도
                   모하며, 친화·단결·상호부조를 행하였다. 또한 경기재인청에서와 같이 천민인 계급의식을 강하
                   게 유지함과 동시에, 비록 일은 지천하더라도 오직 마음은 선랭하게 사람의 도를 행하고 사람의 일
                   을 행하는 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 도덕적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동족의식·동류
                   의식의 발전으로 볼 수 있는 동시에, 장흥의 신청완문(神廳完文)에서 무부등구폐절목(巫夫等舊弊
                   節目)에 보면 무세(巫稅)가 많아 고통받는 무호(巫戶)의 궁핍을 구제하였다. 또한 노량진 풍류방의
                   완의(完議)는 무호가 점차적으로 줄어드는 것을 개탄하며, 무악의 장래 생업을 염려하는 오직 경제
                   적 기관으로서 이것을 설치한 것과 같이, 그 절목 하나하나가 대부분 경제상의 규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다.”라 하였다.


                 이로써 각 지방에 설치되었던 무속인들의 단체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하여 폐지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신분제의 철폐와 세금제의 변화가 무속인들로 하여금 동류의식을 상실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세금을 내기 위하여도 단체에 회비를 내야할 이유도 없어진 것이었다.
               또한 단골판을 범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제재(制裁)를 받을 이유도 근거도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산시 부산동에 거주하였던 이종만이 소장하고 있었던 문서
               를 통하여 경기재인청의 위상이 전국 최고였으며 최상의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던 무속인들을

               포함한 재인, 예인들의 집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Ⅳ. 오산시 부산동의 역사적 의미





                 오산시 부산동은 조선 최고의 무속인과 재인, 예인들의 집단인 경기재인청의 본거지였으며,

               경기도 재인청을 이끄는 도대방, 도산주가 거주하였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이는
               부산동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지역이었는지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삼국 시대의 오산은 한강의 지배권에 따라 그 지배국도 여러 번 바뀌었다. 우선 이 지역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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