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3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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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규모나 전문성에서 이 조직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조선시대 최대, 최고의 예인집단

                이 재인청(신청 등)이고,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20세기 초반
                협률사와 광무대 등 근대 종합예술단 구성에 이르기까지 한국예인들의 중심산맥이기도 하다.
                  경기 무인 출신인 산이들의 자치기구인 경기재인청은 같은 무계인 무당, 곧 미지들도 속해

                있다. 다만, 무당들이 민간에서 의례적인 활동을 할 때 산이가 무악을 할지라도 무당이 주도했
                다는 점에서 국가기관에 종사한 산이들과 그 위치가 달랐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도 경기도에서는 재인청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선 노
                량진의 경우처럼 ‘노량진풍류방’이라고 했다. 무(巫)를 수행하는 세습 무인들의 자치기구나 그
                청사(廳舍) 이름은 지역마다 달랐는데, 경기도가 재인청이나 풍류방(風流房) 또는 광대청(廣大

                廳)이나 화랑청(花郞廳)이라고 하였다면,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은 신청(神廳)이었다. 평안도,
                함경도가 사무청(師巫廳)이나 스승청, 제주도에서 슨방청이나 신방청(神房廳) 등이 있었다. 이
                들 모두가 지역과 기능 그리고 국가기관의 편제에 따라 때로는 장악청(掌樂廳), 악공청(樂工

                廳), 공인청(工人廳), 공인방(工人房), 취고청(吹鼓廳), 기생청(妓生廳) 등의 이름으로 불리지
                만 대부분 그 구성원들은 산이(山이) 출신들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8도의 행정조직에 따라 전
                국적인 망으로 조직되었으며, 조선중기 전후로 그 조직원 수가 경기도의 경우 4만여 명, 전라

                도의 경우 5만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무당과 그 남편인 무부(박수 도는 화랑)들을 때로는 ‘당골’(단골, 감골 등)이나 ‘화랭이(화랑

                이, 花郞)로 불렀으며, 그리고 이들은 무업으로만 끝나지 않고, 장악원과 군영 등 중앙과 지방
                의 국가 기관들 뿐 아니라 예인집단의 주요 구성원으로 진출하였다.
                  20세기 초반기에는 협률사, 광무대, 장안사 등 근대적인 종합예술단을 구성하고 있기도 했

                다.
                  고수와 춤의 명인인 한성준과 같이 동학도가 되어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중심인 손화중 장

                군과 김개남 장군의 주체로 신분해방을 확립하여 한국 근대화를 이끌어간 당사자들이기도 했
                다.
                  신과 인간 사이의 ‘거룩한 두려움’을 높은 수준의 가무악으로 굿 현장을 화해와 충만한 예술

                성으로 이끌어 갔던 장본인들이다. 가무악의 통합적인 학습체계를 치열하게 전개하여 다중 예
                술성을 획득한 준비된  예술인이었다.
                  이러한 예술성을 바탕으로 판소리를 전문화시킨 소리꾼은 광대로 진출하고, 가야금, 거문

                고, 해금, 젓대(대금), 피리 등의 악기잽이들은 악공(공인, 고인)등으로 진출하였으며, 줄타기
                와 따 재주 등 잡희 판을 재인으로서 주도하였다. 또, 전문 춤꾼으로 국가기관에 진출하여 정



                                                          경기도당굿과 경기재인청 그리고 이용우의 삶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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