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1 - 오산학 연구 1집
P. 231
재인청 도대방 이종하(李鍾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또, 한국 무속을 최초로 수집 연구하여
『조선무속의 연구』라는 책으로 펴낸 일본인 학자 아카마쓰 지죠, 아키바 다까시가 오산에서 채
록한 오산열두거리(오산12제차)를 위의 책에 기록했는데, 이때 이 자료를 구전으로 행하여 제
공한 사람이 경기재인청의 도산주였던 이종만이었다. 이용우는 이종만의 조카이기도 하다. 조
부는 이규인, 증조부는 이광달, 고조부는 이계명이다. 이종하, 이규인, 이광달은 8도도대방이
7)
었으며, 3대가 8도도대방을 맡기는 쉬운 일이 아니며, 이용우 가계의 우수함을 나타낸 것으
로 볼 수 있다.
이용우는 서모 박금초에게 8살부터 판소리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부친의 권유로 통도사에서
소리를 익히기도 하였다. 작은 아버지 이종만에게 당굿을 배우는 동안에는 밖에도 나가지 않
고 꼬박 6년을 배웠다. 그 후 그는 한때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판소리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29세 때 목이 부러져 끝내 판소리를 포기하고 무업을 다시 계승했다고 한다.
1920년대가 되면서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재인청도 강제로 폐청을 당하는데 당시 회원이
4만이나 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이용우와 그의 제자 오수복은 경기도당굿이 문화재로 지정받도록 하기 위해 관계부처를 찾
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될듯했던 일이 큰 진전이 없게 되며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
다. 경기도당굿의 춤이나 가락으로 먼저 인정받은 다른 분야 예능인들과의 중복성이 문제가
되었다 한다. 경기도당굿은 소리나 춤사위, 장단, 굿에서 사용하는 음악 등이 독창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경기도당굿의 예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 도살풀이, 태평무, 승무 등 중요무형문화
재로 지정이 된 무용이 경기도당굿의 장단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 이외에도 터벌림, 진쇠춤 등
많은 춤들이 경기도당굿을 모체로 하여 창출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용우는 문화재 지정을 포기했고, 문화재 지정을 못 받을 것을 이수하면 뭐하
냐며, 제자들의 배움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울분을 달래려 낚시를 나선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당굿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그가 죽고 난 4개월
뒤였다.
이용우의 제자인 오수복은 평소 지근거리에서 스승 이용우를 모셨는데, 이때 보고 느낀 것
에 대한 이야기에 의하면, 이용우는 성격이 곧아서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는 것이 없었다고 한
다. 완벽한 상태가 될 때까지 학습을 시켰으며, 굿판에 들어가서도 농을 하는 법이 없었고, 허
락하지도 않았다. 사망하기 전 10여 년 동안은 국립국악원 무대에 초청을 받아서 오수복과 함
7) 하주성, 『경기도의 굿』, 경기문화재단, 1999, 19쪽.
경기도당굿과 경기재인청 그리고 이용우의 삶 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