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9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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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수원부읍지에서도 오매(烏梅)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1800〜1834년-순조(純祖) 때에 발간된 여지도(輿地圖)에는 오천(烏川)으로 기록되었다.
•1831년-순조 31년에 간행된 화성지(華城誌)에서는 오매(烏梅)천으로 표기되었다.
• 1834년-김정호(金正浩)가 그린 청구도(靑邱圖)에서는 토범(菟汎)천으로 표기되었는데 여기서 토
(菟)는 예전에 오(烏)와 같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 1835년-위의 청구도와 마찬가지로 김정호가 쓴 청구요람(靑邱要覽)에서는 토현(菟峴)천으로 표
기 되어 있다.
• 1910년-사선읍지(私選邑誌) 영인본, 경기도편 산천조에 오매천(烏梅川)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재
부남 40리 청호면(在府南四十里晴湖面)이라 나온다.
이곳에서 보듯이 오산이 오산(烏山), 오산(鰲山), 오매(烏梅), 오천(烏川), 토현(菟峴), 토범
(菟汎) 등으로 달리 표기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산에선 1700년대 이후가 되면 까마귀
오(烏)를 피하려는 지명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략 주자학에 경도되던 시기인 조선 중, 후기에 상징 의미 변경이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
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주자가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기록한 것에 연
유하는데,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주자는 송나라(宋, 960~1279)사람이다. 이웃한 조의(검은 옷)를 입는 금나라(金,
1115~1234)가 주자의 모국인 송나라를 지속적으로 침략해 오자, 송나라 사람들은 조의를
입은 침략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다. 여진족의 뿌리는 발해
(698~926)이며,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이다. 고구려(BC37~668)는 조의선인으로 불리는 나라
이고, 삼족오는 고구려를 상징한다. 까마귀는 두려움의 영물인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주자는
그의 글 속에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낙인찍는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다. 주자학을 정치 신념으
로 삼던 조선 후기의 조선에선 중국인과 친근한 까치는 길조, 까마귀는 흉조라는 인식이 형성
되게 된 것이다.
한글학회에서 펴낸『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전국에 오산(烏山)이라는 지명은 26개, 오산(烏
山)과 동의어(鰲山, 梧山, 五山, 五美, 五味 등)를 포함하면 114개나 된다. 오산시는 오산이라
는 지명을 가진 곳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새롭게 기억하고, 기록되어야 할 오산이야기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