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8 - 오산학 연구 1집
P. 168

“하늘에 까마귀가 많이 날아다녀 역명을 오산역이라 했다”



                 이러한 여러 설중에서 오산에 까마귀가 많아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오산 지역에 까마귀가 많았고, 까마귀의 상징성이 오산의 정체성에 맞았기 때문
               이다.



                 오산(烏山)이란 현재의 지명으로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1451년에 개찬된 『고려사(高

               麗史), 세가 권 제25』원종1년(1260년)에 고려왕과 몽골 장수 속리대가 함께 개경과 강화도를
               오가면서 몽장 속리대가 주둔하였다는 기록이다.



                   “속리대가 을유년에 또 오산(烏山)에 퇴둔하였다.(束里大還歸乙酉 退屯于烏山)”


                 글의 내용을 봐서는 강화도나 개경 근처의 오산(烏山)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오산(烏山)이라는 설도 있다. 이어서 1452년에 편찬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보임으로서 약 750년 전부터 오산(烏山)이란 지명을 써온 것으로 추정
               한다.



                 조선 태종3년(1403년)에도 태종임금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오산(烏山)에서 머물렀다’는

               기록과, 세종6년(1425년)에도 세종대왕이 현재 우리가 사는 ‘오산(烏山)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오산시사편찬위원회가 고문헌에서 조사하여『오산시사』에 기록한 오산천(烏山川)의 변천 기
               록 과정을 보자. 이곳에서도 오산(烏山)의 지명 변화 모습을 볼 수 있다.



                   • 1481년-성종(成宗)조에 노사신이 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용인현 산천(山川)조 구흥천
                    을 설명하면서 수원부 오산원천(烏山院川)이란 천명이 나온다.
                   • 1611년-광해군(光海君) 3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위와 동일한 오
                    산원천(烏山院川)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1753년–이중환(李重煥:1690〜?)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오산(鰲山)이란 지명이 나오고 오산
                    장(場)이 3일과 8일(당시엔 음력 사용)에 열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 1789년-정조(正祖) 13년에 간행된 수원부읍지의 산천조에 오매(烏梅)천으로 기록 되어 있다.




               166  남경식
   163   164   165   166   167   168   169   170   171   172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