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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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부르면서 경찰서 주재소에 이르렀다. 연도의 주민들도 참여함에 따라 시위대는 2,000명으
29)
로 불어나 있었다. 차병한이 군중들에게 “주재소를 파괴하자!”고 외치자 주민들은 돌세례를
가하기 시작했다. 순사보 3명이 먼저 도망쳐 나오고 얼마 안되어 주재소 순사 가와바타가 앞
으로 달려 나와 주재소에 들어간 군중 30명을 향하여 총을 쏘아 3명을 쓰러뜨렸다. 이 광경을
본 시위대는 격분하여 일제히 순사가 도망친다고 소리치자, 이치덕(이현기)은 “빨리 순사를 죽
이자.”고 소리쳤다. 순사는 주재소 북쪽 언덕까지 달아나자 군중들에게 포위되었고, 이치덕,
장제덕, 차희식, 차봉래 등이 앞장서서 몽둥이로 난타했다. 순사는 서너 번 몽둥이를 맞고 나
뒹굴었다. 군중은 잇따라 몽둥이나 돌로 순사를 처단하여 죽였다. 순사를 죽인 뒤 일동은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30)
이러한 상황이 되자, 일제는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 중위가 이끄는 1
개 소대 수비대 병력이 발안에서 들어와 화수리를 완전 포위하고 마구 총질을 해댔다. 수비대
들이 보복할 것을 예상한 주민들이 대피하여 마을에 사람이 없자, 화수리 여수동, 화수동, 굴
원리 주민들은 일본 경찰의 보복을 예상하고, 노인들만 남기고 캄캄한 밤중에 원안리와 호곡
리 바다 쪽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피신했다.
수비대들은 동네에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아있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몽둥이질을 하여 탈진하여 쓰러지면 냇가에 들어다 팽개쳤다. 화수리
구장 송찬호는 72군데나 칼로 난도질당하였다. 이러한 체포와 고문이 동리마다 이어졌다. 한
각리, 마산동 주민들은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 당하였고, 조암리에서는 주민들이 보이지 않자
큰 집들만 골라 불을 질렀다.
1919년 4월 4일 수비대가 화수리를 수색할 때 수촌리 반장 이봉구가 들고 다닌 ‘조선독립만
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기가 발견되었다. 수비대는 장안면, 우정면 시위가 수촌리 주도로 이
루어졌다고 단정하고 4차에 걸쳐 보복을 가했다.
1919년 4월 5일 새벽 3시 반 아리다 중위가 이끄는 30명의 수비대가 수촌리를 포위하고 집
집마다 불을 놓아 불바다를 만들고 불길을 피해 뛰쳐나오는 주민들에게 사정없이 총을 난사했
다. 이날 수비대의 방화로 민가 24채가 불탔다.
2차 보복은 발안 장터 시위가 있은 4월 5일 저녁 70여명의 주민들을 밧줄로 묶어 발안주재
소로 끌고 가 악랄한 고문을 가했다.
29)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3쪽.
3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370쪽.
1910년대 항일운동과 오산 3·1독립만세운동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