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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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36)
이봉구, 안진순, 안봉순, 안종후, 강태성, 김정헌, 김성렬 등 10여 명은 주재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수원경찰서로 이감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방면되었다. 이봉구는 수원
경찰서에서 받은 고문의 여독으로 수원형무소에서 옥사했다. 37)
5. 향남면 제암리 학살사건
제암리 주민의 거의 전부가 천도교와 감리교 신자였는데, 동학혁명운동 이전에 이 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어 천도교 신자가 많았고, 감리교는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아 입
교한 안종후에 의해 들어왔다. 초가집의 교당이 제암리에 있었고 인근지역을 합하여 15호의
신자 집이 있었다. 감리교인은 천도교에 비해 늦게 들어와 수적으로 천도교인에 비해 적었
다. 38)
3·1운동이 일어나자, 제암리 감리교 신도인 안종후는 장안, 우정면 시위운동을 총 주도한
백낙렬, 고주리 김홍렬의 동생 김성렬과 함께 이 지역 대표로서 서울에 올라가 탑골공원 독립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김홍렬은 수촌리,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 장안면 구장회장,
수촌리 구장을 겸하면서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였는데, 백홍렬과 구한말 전직 관료로서 유학자
인 이정근과 더불어 이 지역 3·1운동의 총 책임자였다.
그는 1919년 3월 16일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연락 차 내려온 이병헌을 만나도록 제암리 천도
교 순회교사 안종린과 전교사 안종환을 수원에 보냈다. 이들이 수원에서 일본 소방대원의 습
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내려온 것을 제암리에 살면서 이 마을 주민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조선인 순사보 조회창에게 목격 당하였다. 39)
이러한 사실들이 일본 수비대가 제암리, 고주리,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을 이 지역 시위운동
의 중심으로 주목하게 된 한 요인이 되었다.
1919년 4월 1일 백낙렬과 김홍렬, 이정근 등의 지시에 따라 팔탄면 고주리의 천덕산, 제암리
진례산, 가재리 당제봉에서 저녁 7시를 기해 일제히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1919년 4월 5일 발안장 시위에 제암리 안정옥, 안종환, 안종후, 안진순, 홍원식 등이 앞장서
36)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9쪽.
37)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9쪽.
38)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9쪽.
39)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10쪽.
118 강경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