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6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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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와 비밀리에 독립운동준비에 착수했다.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도사인
백낙렬은 고주리 김홍렬을 찾아가 고주리 전교실에서 두 명을 선정하여 수원에 올려 보내 중
앙의 지시를 받아오게 했고, 김홍렬은 제암리 전교사 안종환, 이종린을 1919년 3월 16일 수원
에 올려 보냈다. 수원에서 일본 소방대와 일본인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도망쳐 돌아온
이들을 통해 지방교구 자체의 부담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이병헌을 통한 중앙의 지시를
받아 김홍렬은 향남면, 팔탄면을 책임지고, 백낙렬은 우정면, 장안면의 삼괴지역을 책임지고
추진하기로 계획하였다. 26)
1919년 4월 1일 밤 7시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인근 각 산봉우리에서 일제히 봉화가
치솟았다. 이때 참여한 현병기의 회상이다.
“높은 산들이 불길로 꽃밭을 이룰 때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에 산이 흔들리는 것 같았
고 그 절규는 함정에 빠진 맹수가 구원을 요청하는 처절한 울부짖음 같았다.” 27)
팔탄면 고주리 천덕산으로 발안주재소에 대기하던 일본 수비대가 총을 쏘아대며 올라왔다.
고주리 주민들은 넘어지며 미끄러지며 어둠속에서 산을 내려와야 했으나 다른 지역은 자정 넘
기며 산위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봉화시위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1919년 4월 3
일 새벽 4시 경 백낙렬, 이봉구, 정순영, 홍수광 등은 청수상 앞에서 거사의 성공을 기원한 후
태양이 떠오르자 수촌리에서 집집이 다니며 주민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또 차병한, 차병혁
이 면사무소로 들어가 면장 김현묵 등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면장은 주저하다
가 몽둥이를 든 200여명의 시위 군중이 에워싸자 합류하여 시위대에 합류했다. 군중들은 곤봉
또는 돌로 면사무소 일부를 파괴하고 사무소 내에 비치된 서류와 집기를 훼기한 뒤 쌍봉산에
올라갔다. 이 곳에서 1,000여명이 목소리를 합하여 독립만세를 열렬히 외쳤다. 28)
오후 3시 일동은 산에서 내려와 우정면사무소로 나갔다. 시위대는 면장 김현묵에게 태극기
를 들고 앞장서게 하고, 면서기들은 그 뒤에 세워 그 뒤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독
립만세를 연달아 부르며 우정면사무소를 향해 갔다. 면장이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고무 연설
을 하자 석포리 구장 차병한은 “주재소로 가자!”고 외쳤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26)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1쪽.
27)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1쪽.
28)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3쪽.
114 강경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