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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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수원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
*수원군(水原郡)
1. 수원면(水原面)
이병헌의 『3·1운동비사』에 따르면,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시작되면서 바로 수원에 파급
되어 3월 1일 수원 북문 안 용두각(화홍문)에 수백 명이 모였는데 일본경찰이 해산시키려 하자
군중은 흩어지는 척 하다가 별안간 만세를 불렀다. 순사는 이에 깜짝 놀라 경찰서로 달아나 버
렸다. 12)
1919년 3월 16일에는 장날을 이용하여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에 수백 명씩 모여 만
세를 부르며 종로를 통과하여 시위행진을 하는데 경찰이 소방대 및 헌병과 합동으로 시위를
제지하고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주모자를 검거하자 시내는 전부 철시를 단행하였다. 이에 일
본 경찰은 검거하였던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11시 경 북수리에 있는 천도교에서는 서울에서 연락 차 내려온 이병헌이 교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이 집합하여 서울의 정세를 듣고 앞으로의 독립운동비를 부담할 것을 논의
하던 중 소방대와 일본인이 합세하여 소방용 갈구리와 괭이로 대문을 파괴하고 침입하여 모여
있던 사람들을 구타하였다. 김정모, 안종환, 안종린, 홍종각, 김상근, 이병헌 등이 중상을 당
하였다. 이날 밤 12시 반 경 일본인들은 삼일여학교도 습격하였으나 숙직원뿐이어서 사무실만
파괴하였다. 13)
3월 23일에는 수원역 부근의 서호에서 700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수원역 앞에서 일본경찰과
헌병대 및 소방대의 제지를 받고 해산했다. 14)
1919년 3월 25일에도 수원 장날을 맞아 청년, 학생이 앞장서서 약 20명의 학생, 노동자가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10명이 붙잡혀간 후 해산되었다. 15)
이튿날인 1919년 3월 26일이 되자 전날의 시위에서 만세시위자들을 붙잡아 가둔 데 항의하
12) 이병헌,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868쪽.
13) 이병헌,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868쪽.
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 1968. 263쪽.
15) 일본육군성,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 독립에 관한 건, 477쪽. 고제8874호(1919. 3. 26)
110 강경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