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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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측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1910년 이후 경기도 삼곶리에서 의병 2명이 일본 헌병과 교전을 하였고, 마전에서는 의병 7
                명이 나타나 일본 헌병 5명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 포천에서는 의병 수 명이 나타나 일본군
                과 격전을 벌인 기록이 대표적인 것이다.

                  무장항일운동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민족운동은 방향
                을 전환하였는데, 각종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국외의 독립운

                동을 후원한다든지 민족의 항일 역량을 키워가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비밀결사조직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유사종교조직이나 지역 유지들의 소규모 모임의 형태
                를 띠면서 지하운동을 벌여나갔다. 또 한편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교육계몽운동도 벌

                여나갔다. 사립학교들이 1911년 「사립학교규칙」, 1915년「사립학교규칙」등으로 인해 대탄압을
                받아 그 수가 감소하자 전통적 교육기관인 서당을 통해 교육계몽운동이 확산되었다. 수원의
                경우 대한제국 시기에 관직을 역임한 이정근이 팔탄면, 향남면, 봉담면, 정담면, 우정면, 장안

                면, 남양면 등 7개 면에 서당을 세워 3·1운동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민중들은 일제의 무단통치와 수탈로 생존권 투쟁을 벌여 나갔다. 일제의 경제적 수
                탈은 경기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인은 인천에 1만

                2,000명, 수원군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어 경기도에 인천을 비롯한 수원, 고양, 개성, 시
                흥군 등에 약 2만 3000여 명이나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산업의 각 부분에 종사하거나 민족자본의 발전을 저해하며 농민을 수탈하였다. 그리
                고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주세, 연초세, 부역동원, 토지 가옥 몰수 및 공동묘지제를 강요하
                여 민중의 반일의식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3·1운동을 전후한 1919년 한 해에만도 인

                천부두 노동자(6월), 개성우편국의 우편배달부(8월), 안성제화공장 노동자(11월)들의 파업이
                반일의식과 결부되어 생존권 수호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1910년대 경기 지방에서는 반일의병전쟁, 교육계몽운동, 비밀결사활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이 일제의 무단정치에도 굴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투쟁은 고립 분산적이고 산발적인 진행이라는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투쟁의 경험을

                통해 경기도 지방의 반이 민족운동의 총역량을 결집시켜 3·1운동을 분출시키는 원동력이 되
                었다.  5)





                5)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274~275쪽.


                                                           1910년대 항일운동과 오산 3·1독립만세운동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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