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6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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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의병 봉기는 처음 양근에서 일어나 양근읍내의 일제 기관을 습격하였는데, 이 의병은

               조인환, 권인경이 이끄는 농민군이었다. 그 뒤를 이어 농민들이 주축이 된 150여 명의 의병이
                                          2)
               지평에서 항전의 불길을 들었다.
                 그 후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이천, 여주, 지평, 양근 등 여러 군에서 의병

               이 일어나 이에 합세하여 일제와 항전하였다.
                 1907년 8월 10일 여주 의병이 한강을 운항하는 일본 목선을 기습하여 일본인 20명을 처단하

               였으며, 12일에도 여주읍내를 포위 기습하여 3시간의 격전 끝에 일본 경찰 10여명을 사살하고
               읍내를 점령하였으며, 같은 날 서울 원주 간 일제 연락망을 차단하고 음죽, 장호원을 장악함
               으로써 원주에 주둔중인 일본군을 고립시켰다. 또 동월 15일에는 죽산읍을 의병들이 점령하여
                                               3)
               일본인과 친일협력자들을 처단하였다.
                 15일 새벽 0시에는 수원역에 수십 명의 의병이 출동하여 일본군경을 공격하였고, 남양읍에
               는 읍민 수백 명이 일제가 운영하는 우편취급소를 기습 파괴하였다.

                 이렇게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여지자 일제는 일본 정규군 병력을 투입하여 의병을 포
               위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으며, 계속 항전을 이어갔다.
                 이천의병, 파주의병은 도로상의 전신주를 파괴하여 일본군의 연락망을 두절시키고 각지에

               서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1908년 왕성하던 의병 활동도 가을에 접어들며 난관에 봉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일제의 이른

               바 남한대토벌 작전에 의해 의병부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의 잔인한 초토화 작전으로 의병활동은 활동근거지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특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지방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 1909년부터 1910년 말까지 그나마 의병들의 명맥을 이어간 곳은 경기도와
               강원도 지방의 의병들이었다.

                 1909년 경기 의병의 활동을 일제 측 통계로 살펴보면 교전 의병 수는 3,453명. 교전 횟수
               165회로 나타났다.     4)
                 1910년 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활동이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항일운동

               의 방향은 비밀결사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의병활동에 관한 기록도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1968. 262~264쪽.
               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1968. 265쪽.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1968. 296쪽



               104  강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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