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오산학 연구 1집
P. 109
2. 3·1독립만세운동의 전개
3·1운동의 준비 및 추진은 일본, 미주, 만주, 상해 등 국외 지도자들과 국내의 기독교, 천도
교 지도자 및 학생층에서 비슷한 시기에 각기 준비되고 있다가 하나로 통합되어 한민족의 일
치단결된 3·1민족독립운동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3·1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것은 활동
이 자유로운 국외 지도자들이었다.
미주의 경우 이승만, 안창호, 정한경 등을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등이 조직되어 독
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중, 1918년 1월에 민족자결론이 발표되자 정한경은 미국 각 신문에 이
를 환영하는 글을 연재하였고, 국민회를 세계약소국동맹에 가입시키고 자신이 직접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을 호소하려고 여권절차를 밟고 있었다 (1918년 12월 초). 또 이승
만, 안창호도 대한인국민회총회 명의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독립을 청원하는 건의서를
보냈으며, 샌프란시스코 거주 교포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등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고 했다. 6)
이와 같은 움직임을 미리 탐지한 일본이 이를 방해함으로써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재
필이 그 자금으로 영문 잡지를 간행하여 한국독립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중국에 망명하고 있던 민족지도자들도 상해에서 발간된 영자신문을 통하여 민족자결론과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관한 사실을 알고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1919년 2월 1일에 한민족 대
표로 파리에 파견하는 한편 장덕수를 일본에, 여운형을 노령에,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
를 국내에 각각 파견하여 각계 지도층 인사들과 접촉, 거족적 운동을 계획하게 하였다. 7)
독립의 기회를 기다리며 가장 뜨거운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1월 이전에, 국내외의 유명한 민족지도자 39인이 망라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함으로
8)
써 일본과의 최후의 혈전까지 다짐하였다.
국외 독립운동 추진 중 국내 3·1운동 거사에 가장 강한 영향을 준 것은 일본에서의 2·8독
립선언이다. 한국 유학생들이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서 대한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
쳤다는 것은 한국민족의 국권회복의지를 잘 표현한 것으로서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갖는다. 특히 3·1운동을 선도하였다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다. 그런데 2·8독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1』, 1978. 66쪽.
7)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3』, 1988. 70~181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 1966. 141~143쪽.
8) 당시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선언서』로서 이것이 발표된 일자에 대하여 여러 학설이 있다. 1918년 12월 설,
1919년 1월 설, 1919년 3월 이후 설 등이 있다.
1910년대 항일운동과 오산 3·1독립만세운동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