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3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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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아침부터 상인들이 상점 문을 닫고 철시 시위에 돌입하였다. 1919년 3월 27일 들어서는 전
상점의 약 4할인 60호가 문을 닫을 정도로 확산 되어 갔다. 16)
이러한 수원면민의 폐점 항의는 3월 31일까지 이어져 일제를 당혹스럽게 했다. 1919년 3월
31일의 상황을 이병헌은 이렇게 기록했다.
“수원시내에는 계속하여 만세를 외치므로 인심이 소연하였다. 독립의 의기가 충만하여 31일은 장
17)
날인데 촌 장꾼 하나 없었고 각 상점과 음식점까지도 문을 닫아 거리는 매우 적막하였다.”
1919년 4월 1, 2일 군수는 유력한 상인 6명을 소집하여 상점을 다시 열도록 회유와 압력을
가했다. 18)
한편 1919년 3월 29일 수원면내에서는 기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수원 기생조합 기생들이 자
혜병원으로 검진을 받으러 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그중 김향화가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지휘를 하자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병원으로 가서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병원에서
이러한 이들의 검진을 거부하자 병원을 나와 다시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날 또한 300명의 학생, 기독교인, 일반인이 중심이 되어 격렬한 시위를 일으켜 18명이 검
거되고 관공서 및 민가 6채가 파괴되었다. 19)
그 이튿날인 1919년 3월 30일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읍내를 감돌고 있었다. 경기도장관은
“이날은 수원 장날로서 일반으로 살기를 띠고 위험의 경향이 있으므로 보병 제79연대로부터
병원(兵員)을 파견할 터이다.”라고 하였다.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 342번지 거주 이종상(일명 득수, 당시 20세)은 일본의 굴레에서 벗
어나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면서 1919년 독립만세시위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3월 말부터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 관계 인사 차관호와 연락하여 서울의 동대문 안에 거주하는 박성환 (일
명, 김일)에게서 보내오는 독립신문을 여교사 차인재와 함께 1919년 8~9월경까지 수원면내의
조선인 집에 배포하기를 계속하였다. 그후 1919년 9월 경 남창리의 박선태(학생, 당시 21세)와
지하 유인물의 배포를 통하여 독립사상의 선전에 힘쓰고자 하여 1920년 7월경까지 수원에 사
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 1968. 263쪽.
17) 이병헌,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870쪽.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 「경기도장관 보고」, 1968. 669쪽.
19)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其3」, 1977. 169쪽.
1910년대 항일운동과 오산 3·1독립만세운동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