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5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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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뜨렸다. 총소리에 군중이 잠시 후퇴했는데 누군가 소리치기를 “조선인이 총에 맞았다.”는 소

                식을 듣고 홍면의 동생 홍준옥이 달려와서 우리 형이 총을 맞았는데 총 쏜 놈을 죽여 달라며,
                격앙된 시위 군중이 일본 경찰을 잡으러 달려가니 노구치와 마스우치 두 순사는 남양을 향해
                도망갔으나, 군중들은 뒤쫓아 노구치의 자전거를 포위하고 끌어내려 돌과 몽둥이로 처단하였

                다. 23)
                  일제는 이에 대해 경찰관들을 급파하여 해산시키고 73명을 검거하였다. 1919년 4월 9일에

                는 다시 쓰무라 헌병특무조장을 장으로 하사 이하 6명, 경찰관 4명과 이메 수원경찰서장 이하
                7명, 보병 15명을 3개 반으로 편성하여, 오산, 화수리 지역과 사강지역에 폭압적인 대검거를
                위해 출동하였다. 1919년 4월 1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강리를 중심으로 한 부근 송

                산면, 마도면, 서신면의 20개 마을에 대한 대검거를 행하여 주도자급 이하 175명을 검거하고
                증거품을 압수하였으며, 1,202명에게는 시위를 재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날인하게
                했으며, 이장 이하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회유 연설을 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211채의 가옥

                에 불을 질렀다. 이 화재로 마을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사강의 시위로 홍면은 징역 15년, 왕광연, 홍준옥, 문상익은 각각 징역 12년 등 모두 37명이
                최장기 15년부터 단기 6개월까지 처해졌다. 이중 22명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일부 감형

                       24)
                되었다.


                3. 우정면(雨汀面), 장안면(長安面)


                  우정면, 장안면은 경기도 서남단의 반도지역으로 예로부터 삼귀(三歸) 도는 삼괴(三槐)라 불

                렸다. 이 지역에 일찍이 동학이 전파되어 1910년에 이미 천도교 남양교구 산하에 수촌리, 거묵
                골, 기림골, 장안리, 사기말, 덕목리, 고주리, 고온리에 8개의 전교실이 있어 1894년 동학혁명

                운동과 1904년 천도교의 갑진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1918년 독립운동 자금을 위한 천
                도교의 모금 때에는 전답과 가옥을 팔아 헌납함으로써 전국 1위를 할 정도로 천도교 활동이 활
                발했으며, 1905년을 전후로 기독교도 전파되어 수촌리, 장안리, 제암리에 교회가 있었다.                        25)

                  3·1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자 삼괴지역 백낙렬, 김성렬, 안종후 등이 1919년 3월 1일 만세





                2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388~399쪽.
                2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380쪽.
                25)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0쪽.


                                                           1910년대 항일운동과 오산 3·1독립만세운동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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