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8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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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7일 제3차로 발안주재소장 사이다와 아리다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수촌리 주변

               마을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주민 130여 명을 무조건 포박하여 발안주재소로 끌고 가 갖은
               고문을 가하고, 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중 27명은 항소심에서 차희식, 이영쇠는 각
               각 징역 15년, 장소진, 장제덕, 정서성은 징역 12년, 차인범, 이순모는 징역 10년, 차병한, 김

               홍식, 정순영은 징역 5년, 김흥삼, 백순익, 안수만, 김명우, 김교철, 김여근, 김응식, 김덕근,
               차병혁은 징역 3년, 김종학, 김응모, 김황은, 윤명선은 징역 2년 6월, 유수산은 징역 1년 벌금
                                                                    31)
               20원에 처해지고, 전 면장 김현묵과 최장섭은 무죄로 풀려났다.
                 수비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19년 4월 8일 제 4차로 수촌리의 남은 가옥을 불태웠다. 그리
               하여 총 42채 가운데 38채가 잿더미가 되었다.



               4. 향남면(鄕南面)



                 1919년 3월 31일 발안에서 1,000명의 기독교인, 천도교인과 농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
               세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길가에서 연설을 하고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면서
               연도의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졌으며,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고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

               며 만세를 불렀다.     32)
                 일본병 5명이 출동하여 시위대에 발포하여 양순서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1명이 체포되었으

               며, 1명이 체포되었으며, 5명이 부상당하였다. 1919년 4월 1일 일본인 가옥에 방화하고, 저녁
               에는 발안장 주변 산 위 80여 개소에 봉화를 올려 산 위에서 시위를 벌였다. 불안해진 일본인
               들은 부녀자 43인을 30리 밖의 삼계리로 피신시켰다.

                 한말 유학자로서 궁내부 주사를 지낸 이정근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 수원
               군 팔탄면 가재리로 돌아와 우정면, 장안면, 향남면, 봉담면, 정남면, 양감면, 남양면의 7개 면

               에 산재한 제자들과 동지들을 모아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배양하고 있었다. 3·1독립만세운
               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가자 그는 장안면 수촌리 백낙렬과 향남면 제암리 안정옥 등과 자주
               만나 정국에 대해 의논하는 한편 이 지역에서도 거사할 것을 의논하고 4월 1일, 2일 저녁 7시

               를 기해 당제봉에 올라가 마을 주민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3)





               3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359~360쪽.
               32)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7쪽.
               33)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07쪽.



               116  강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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