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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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마을 주민과 함께 발안장 시위에 참여하여 수촌리 주민과 주재소를 둘러싸고 투석전을 벌
였다. 시위 도중 제암리의 김덕용이 수비대의 칼에 옆구리를 찔렸고, 홍원식, 안종후, 안봉순,
강태성, 김정헌, 김성렬 등 6명은 수비대에 끌려가 수원으로 이송되었다.
1919년 3월 하순부터 4월 초까지 관공서가 공격을 당하고 화수리와 사강리에서 순사 2명이
피살되었다. 이에 대한 피의 보복이 4월 4일부터 4월 13일까지 장안면, 우정면 일대를 휩쓸었
다. 그런 속에서 일본군 제20사단 보병 제79연대 중위 아라다가 수원정, 발안장 수비명을 받
고 1919년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하였다. 제암리에 살면서 주민들의 동태를 감시해 밀고해 온
조회창의 정보를 통해 삼괴지역 독립운동의 근원이 제암리의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라고 확신
했다.
일제는 주민들이 이 마을에 있는 초가의 감리교 교회당에 모두 모이자 수비대가 교회당을
완전 포위하고 출입구와 창문을 모두 큰 못으로 박아 도망가지 못하게 밀폐한 다음 사이다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던 사람들도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천도교 전교사 안종환은 그런 줄도 모르고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들어갔다가 죽게
되자 어린 아들을 창밖으로 내보내며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 어린 것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
했으나 수비대들은 눈곱만큼의 인정사정도 없이 어린 아이를 군도로 내리쳐서 참살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안종엽과 김정헌은 교회당의 흙벽을 뚫고 사력을 다해 도망갔으나 수
비대의 총탄에 맞아 즉사했으며, 뒤이어 안경순도 도망치다가 역시 총탄에 맞아 쓰러진 것을
수비대가 쫓아가 칼로 목을 쳐서 죽였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뿐 아니라 온 마을 전체
에 불을 질렀다. 40)
제암리 33채의 집 가운데 곡구래미의 외딴 집 2채만 남고 31채가 모두 불탔다. 마을 전체를
태운 연기와 재는 시체를 태우는 악취와 함께 30여 리 바깥 마을까지도 코를 막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일이 죽은 사람 배창자가 나오도록 다시 총검으로 찌르며 다녔다. 교회당 안에 들어
가지 않은 부인 두 사람도 참살되었다. 41)
이 아비규환 속에서 오직 노경태만이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뿐 교회당 안에 있다가 희생당한 천도교 신자가 15명이고 감리교 신자 및 기타가 7명, 교회 밖
40)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12쪽.
41)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12쪽.
1910년대 항일운동과 오산 3·1독립만세운동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