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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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집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쳐서 이들 주택의 유리창, 판자문을 때려 부숴버렸다.
이들은 1919년 11월 6일 조선총독부 판사 가나가와의 심리로 진행된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에
서 이성구, 이규선은 징역 1년 8개월, 김경도는 징역 1년 6개월, 공칠보는 태형 90, 정규환은
징역 1년, 김용준, 안낙순은 각각 징역 6개월에 처해졌다. 유진홍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
년으로 확정됐다. 59)
이렇듯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학생과 천주교도들의 시작으로 시작되었고 이
후에는 오산장에서 좀 더 조직적으로 농민과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오산주민 모두가 적극적으
로 참여한 빛나는 독립운동이었다. 60)
이 오산장 시위는 발안장 시위와 함께 경기도 지역 전체로 만세 시위를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오산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뒤 곧바로 다음날에는 권율의 세마대첩으로 유명한 곳
인 독산성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오산지역의 양산동 주민, 산성면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른 것으로 파악되는데 일제히 불을 밝히고 만세의 함성을 소리 높여 일제에 항거한
것이다.
오산지역이 타 지역보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배경에는 오산지역의 교육열을 들
수 있겠다. 오산은 일찍부터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사립학교인 신명학교가 있었다. 일제는 이
학교를 폐쇄시키고 1913년 4월 1일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를 개교시킨다. 학교가
타 지역보다 일찍 존재한 것은 교육열이 높았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또 다른 배경은 천도교의
교세가 있었음을 배경으로 한다. 천도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많이 참여하였음은 이로 알 수 있
다.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오산지역도 농업적인 경제침탈이 가속화되었고, 이러한 사
안도 만세운동의 배경으로 볼 수 있겠다. 일제의 무단침탈과 억압은 민족의 자존적 존립에 매
우 큰 타격을 주었으며, 광복한 지금도 남북 분단이란 고착적인 민족의 대립을 겪고 있는 것이
다. 61)
5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348쪽.
60) 남경식, 『오산역사문화』, 우리동네사람들, 2013. 131쪽.
61) 남경식, 『오산역사문화』, 우리동네사람들, 2013. 131쪽.
124 강경구